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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콘텐츠의 잠재력

빛의 시어터 개관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쳤습니다. 여러 글로 제주와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글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즌으로 전국의 다양한 문화예술, 도시건축, 라이프스타일 등을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보는 주제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서울에 최근 개관한 '빛의 시어터'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1. 빛의 시어터


제주의 '빛의 벙커'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서울에서 문을 여는 '빛의 시어터' 개관식에 다녀왔습니다. 통신 벙커를 찾아낸 안목도 놀랍지만 1960년대 개관하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이벤트를 제공하다가 이제는 그 쓰임새를 찾기 힘들어진 워커힐호텔(지금은 워커힐 호텔앤리조트)이라는 장소를 찾아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에 찬란했던 공간들이 쓸모를 잃어버리고 방치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워커힐호텔의 무대도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큰 공간을 훌륭하게 채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주의 '빛의 벙커'를 생각한다면 장소에 어울리는 어떤 훌륭한 콘텐츠가 만들어질 것인지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개관식에서 보게 된 구스타프 클림트와 이브 클랭의 멋진 변주를 보고 있노라니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빛의 벙커, 구스타프 클림트와 이브 클랭

제주에서 '빛의 벙커'의 개관은 문화예술만이 아닌 관광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준 사건입니다.  1970년대부터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이국적 풍경과 독특한 문화는 제주를 관광지로 만들게 되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관광이 조금 지겨워졌다고나 할까 생각하는 순간에 '천천히'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흡수하는 제주올레가 개척되면서 제주는 휴식, 휴양이라는 새로운 관광 콘셉트를 가지게 됩니다. 2007년 사단법인을 만들고 1코스를 개장한 제주올레는 라이프스타일 여행이라는 제주관광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됩니다. 라이프스타일의 최정점에는 문화예술이 있습니다. 제주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섬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 '빛의 벙커'입니다. 최고 수준의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도민만이 아닌 관광객들도 끌어들이게 되었고 코로나19가 휩쓸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50만 명의 입장객이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빛의 벙커'가 있는 성산은 제주에서 자연관광으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들르는 성산일출봉이라는 멋진 관광지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빛의 벙커'가 있는 곳은 일출봉에서 꽤 떨어져 있는 성산에서도 외곽인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콘텐츠의 수준이 최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주에 문화예술 관광이라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제주 성산 빛의 벙커 개관 시기


티모넷이 만든 두 번째 빛 시리즈는 서울의 '빛의 시어터'입니다. '빛의 벙커'를 만든 티모넷이라는 회사는 IT 기업입니다. 프랑스 남부의 폐쇄된 채석장을 '빛의 채석장'이라는 이름으로 멋진 공간을 만든 것을 보고는 예술과 IT를 결합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한국에 '빛의 벙커'와 '빛의 시어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에 위치한 '빛의 시어터'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쇼를 보여주는 무대로 극장처럼 넓고 천장이 높은 대공간을 재생한 곳입니다. 가기 전에 이런 큰 공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엄청난 감동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역시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의 변주와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IKB)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파란색 물감을 만들었던 이브 클랭의 그린 오브제의 변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빛의 벙커


프랑스의 '빛의 채석장' 뿐만 아니라 제주의 '빛의 벙커', 서울의 '빛의 시어터' 모두 쓸모가 다한 공간을 훌륭하게 재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던 건물이나 공간은 나름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 건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있습니다.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가 작가의 작품을 최대한 빛나게 만들어주는 공간으로서 예술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버려진 채석장, 버려진 통신 벙커, 버려진 무대 등의 공간은 자신만의 장소성, 역사성, 공간성으로 예술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목욕탕, 공장, 창고 등 쓸모가 다해 버려진 공간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공간을 채우고 재탄생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창의적인 예술인, 예술적 마인드를 가진 기업인, 행정가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태평탕을 재생한 카페 리듬앤블루스

몇 년 전 제주에 '빛의 벙커'를 만들겠다고 티모넷 관계자께서 오셔서 미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서귀포 대포 해변의 한 카페의 벽에 보여주셨던 데모 영상을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느꼈던 일이 떠오릅니다. 제주에 이런 멋진 콘텐츠가 자리 잡는 것은 제주 현지의 여러 사람들의 노력도 한 움큼 보태졌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요.

'빛의 벙커'의 성공은 제주에서 아르떼뮤지엄, 노형슈퍼마켓, 미켈란젤로 인 메타버스 등 다양한 미디어아트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고, 제주현대미술관에서도 수장고를 활용한 작업으로 도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더 둘러보고 지금 현재 쓸모가 다했다고 그저 철거하는 것만이 아닌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지역이, 로컬이 사는 길일 것입니다. 더 많은 다양한 공간들이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아르떼뮤지엄

미켈란젤로 인 메타버스(텐저린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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