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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en Jun 23. 2022

엄마 말 안 들어도 돼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나의 첫째 아이는 사춘기 소녀이다. 이제 곧 중2가 되는 나이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이 가능하겠다. 한참 까탈스러운 그녀의 구겨진 얼굴을 잠시나마 활짝 피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며칠 전, 친정엄마와 통화한지도 어언 2주가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한국으로 전화를 넣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나 다를까 다시 시작된 엄마의 잔소리. 잠시 배경 설명을 하자면, 사실 엄마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관찰한 결과  ‘골수팬의 기질’이 다분한 여성이다. 배 아플 때 직빵인 숯가루부터 시작해서 고함량의 비타민씨 신봉자이며, 한 군데 꽂히면 열렬히 그 대상(?)을 신뢰하며 따르는 엄마는 본인의 삶에 항시 적용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며 주변에 널리 전파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엄마의 착한 심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엄마의 전도 저변에 깔려있는 ‘사랑하는 딸을 이롭게 해 주고픈 그 순수한 마음’을 되새기며 지금껏 그 모든 말씀들을 잘 들어왔고 심지어는 잘 받아들여 행동하는 착한 딸이다. 아니, 착한 딸이었다. 나이 마흔 넘었다고 제법 머리가 큰 나는, 속으로 엄마의 말씀을 이리 재고 저리 판단해 가기 시작했다. 몸도 멀리 떨어져 이국에 살고 있으니, 고함량 비타민 알약이 내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엄마가 일일이 챙겨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전화통화로 돌아와서, 요즘 엄마가 꽂혀있는 마음공부에 관한 설교가 시작된 지 십분 쯤 후에 내 마음속에선 짜증 비슷한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느 때였으면 착한 딸내미답게 엄마가 만족할 만큼 다 말씀하실 때까지 묵묵히 잘 듣고 있다가 나지막이 “네~ 한번 나도 들어볼게요~” 하며 엄마가 추천해준 유튜브 링크를 클릭했을 텐데, 그날은 내 머리가 채 말리기 전에 내 입이 아웅아웅 움직이고 있었다. “ 엄마, 나 요즘 엄청 바쁘고 챙길 것 많아요. 애들 둘 아침에 도시락 챙겨 보내고, 직장 알아보고, 집안일하고, 이사 준비하고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다니까? 엄마는 시간도 많고 걱정도 나에 비하면 없으니 그렇게 마음공부에 대한 동영상을 오래 볼 수 있는 여유가 있겠지만, 나는 아니에요. 마음공부 좋은 거 나도 알지만 너무 푸시하진 말아줬음 해요.”

…약 10초의 침묵…

세상에서 가장 착한 딸내미가 필터 없이 내뱉은 말들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우리 엄마.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엄마가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그래, 엄마 말 잘 들어줘서 고맙다."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뱉은 건지 실감이 난 나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착한 우리 엄마에게 상처를 준 게 미안하다는 마음, 그리고 그리 엄마 말 잘 듣던 착한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시원 통쾌하다는 마음.   


  저 쪽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첫째를 발견하고 나는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외할머니한테 오랜만에 인사드려라.” 하고 전화를 딸에게 넘겨주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전화를 건네받은 첫째는 할머니와의 통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돼서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분명 자기 핸드폰을 더 보고 싶은 뚱한 표정이었는데, 허리를 피며 바른 자세로 앉기 시작하더니 할머니와 통화를 굉장히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통화를 마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어?” “응, 할머니가 엄마 말 너무 듣지 말으래.” 

…약 11초의 침묵…

배신감이 가슴속에서 뜨끈하게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사춘기 딸내미를 둘씩이나 키워 본 친정엄마가, 요즘 내가 사춘기 딸 때문에 얼마나 속앓이를 하는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엄마 말 잘 들어라~라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아무리 내가 엄마 말을 나지막이 거부했다고 해도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난 지금껏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는데. 주책맞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딸 앞에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에휴, 할머니는 무슨 그런 말을 하시니, 나한테는 잔소리만 하시더니.”

속상해하는 나를 향해 딸내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들려왔다.


“엄마도 듣지 마, 할머니 말”

“할머니가, 엄마 말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니까 다 듣지 말래. 엄마도 그렇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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