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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en Sep 28. 2020

한여름밤의 꿈

배달의 추억

 내가 살던 미국 중부의 한 대학교 타운에는 한국 식당이 서너 군데 있었다. 그중 한 곳은 학교와 가까워서 학생들이 수업과 수업 사이 점심을 사 먹으러 가기 딱이었다. 나도 가끔 선배들 혹은 동기들과 가곤 했는데 처음 그 집을 갔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집의 메뉴판. 보통 한국에서 식당이라고 하면 무언가 그 집만의 대표 메뉴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분식집이라면 떡볶이와 튀김, 순대 등이 그럴 테고, 혹 설렁탕집이라면 각종 설렁탕이 주연을 맡고 곁들이기 좋은 수육 정도가 함께 판매되는 식이다. 그런데 미국 시골마을의 이 한인식당에서 만난 메뉴에서 나는 좀처럼 주인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뉴에는 설렁탕, 알탕, 냉면, 순두부찌개, 회덮밥, 비빔밥, 돼지갈비 등 굉장히 버라이어티 한 음식들이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웬 뷔페냐 하며 기뻐한 것은 잠시. 메뉴의 종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주방장이 이 많은 종류의 메뉴를 커버하다 보니 무언가 음식들이 하향 평준화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국음식이 귀한 외국 땅에서 고국의 맛을 잠시나마 느끼는 것에 갈증을 느끼던 나에게 그런 까다로운 입맛을 내세울 여유는 없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그 하향 평준화된 음식에 내 입맛을 맞추려 노력할 뿐.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각종 동영상을 올리는 플랫폼이 없었기 때문에 양질의 레시피로의 접근도 쉽지 않아 집에서 해 먹기도 쉽지 않았다.  


 또 다른 한인 식당은 학교에서 꽤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가 있어야만 접근 가능한 곳이다. 거리는 멀지만 한인 학생들은 때때로  그곳을 꼭 가고 싶어 하는 매우 인기 있는 식당이었다. 그 식당이 메뉴가 좀 더 단출하며 전문성이 있다거나 한건 아니었다. 좀 전에 소개한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꽤나 버라이어티 한 메뉴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긴 메뉴 리스트에는 다른 어떤 식당에도 없는 특별하고도 막강한 파워를 가진 메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치킨! 미국에서 흔한 KF*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국식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통닭이 바로 그것이다. 주말이나 짧은 방학기간 동안 한인 학생들에게 K-치킨은 그야말로 큰 이벤트요 설렘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집 앞까지 배달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감히 귀한 치느님을 오라 가라 하겠는가. 기꺼이 자동차 있는 지인에게 굽신거리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저 비행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에 한국식 치킨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었다. 바삭한 치킨 한 조각을 물고 기름진 입술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날 만큼은 엄마를 보고 싶은 향수도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치킨집에서 알탕과 회덮밥을 같이 판매한다는 웃기는 현실도 그 날은 별 대수롭지 않다. 


 그렇게 나는 어린 왕자와 여우마냥 9년 동안 ‘마을의 한 개뿐인 소중한 치킨집’에 길들여졌다. 이후 한국에 귀국하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배달책자와 처음으로 만난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배달책자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그 작지만 결코 얇지 않은 책자에서 만난 한국은 그새 많이 변해있었다. 아니 한국에는 치킨집들이 정말 많이 생겨있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인 듯하다. 집까지 배달되는 치킨만으로도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너무나 많은 치킨가게 브랜드 숫자에 압도당해버렸다. 후라이드와 양념 중에 뭘 골라야 하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던 머릿속 선택 회로도 순식간에 꼬여버렸다. 후라이드와 양념으로 나뉘는 분류는 이미 꽤나 고전적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있었다. 뿌려진 치즈라던가 마늘 범벅 양념이라던가 하는, 한 손으로 셀 수도 없는 양념 옵션들의 향연이 펼쳐진 것도 벅찬데 그 이전에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결국 나는 내 힘으로 고르지 못하고 한국 치킨계의 실정을 잘 아는 동생에게 조용히 책자를 건네며 추천을 부탁했던 것이 기억난다.


 배달책자와의 만남 이후로도 배달 시장의 웅장함에 연신 놀랄 일들 뿐이었다. 휴대폰에 설치만 하면 되는 배달앱들이 이미 활발히 활동 중이었고 구매자들의 리뷰들을 발판 삼아 배달 시장의 생태계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한국 배달문화에 첫 충격을 받게 해 준 치킨은 수많은 종목들 중 일부였을 뿐이었다. 배달계의 필수 교양과목 격인 짜장면 짬뽕은 물론이요, 싱싱한 모둠회와 초밥도 무려 초밥 전문점에서 집까지 배달이 되는 한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구석기시대에서 갑자기 인공지능의 시대로 넘어온 기분이었다. 특히나 주부였던 나에게는 이것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생각해 보라. 음식 배달의 옵션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살림과, 다양한 배달 옵션을 손에 쥐고 (하고 싶어서) 하는 살림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살림에 임하는 자세마저 여유 있게 만들어 주는 굉장히 큰 어드벤티지인 것이다. 한국은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 주부들에서부터 자취생들에 이르기까지 - 엄청난 행복감을 주는 천국임이 틀림없다.


후라이드를 파는 단 한 군데의 식당을 향한 몇십 분의 자동차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설레며 떠나던 나의 치킨을 향한 순수했던 시절은 이제 아련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다시 한국을 떠나 현재 살고 있는 이 곳엔, 한국 치킨은커녕  KF* 도 없는 그야말로 치킨계의 척박한 사막이다. 5년 동안 한국의 천국 같은 배달문화를 경험하고 온 나는 그 시절이 그립지만 그저 아시아마트에서 산 튀김가루와 닭고기를 가지고 집에서 흉내나 내 볼뿐이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을 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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