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공원은 두 세계의 경계 같은 곳이었다. 공원을 기준으로 이편에는 지은 지 20년 넘는 아파트가 빼곡했고, 저편에는 티비에 광고까지 나오는 고급브랜드의 아파트가 즐비했다. 이편의 사람들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봤고, 저편의 사람들은 차를 몰고 대형마트로 갔다. 그렇다고 이편 사람들이 저편을 부러워하거나 저편 사람들이 이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웬만해서는 이편과 저편이 얽힐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장방형의 공원을 사이에 끼고, 두 세계는 나란히 평행선을 달렸다.
두 세계의 경계에 놓인 공원은 다행히 어느 쪽도 닮아있지 않았다. 적당히 키 큰 전나무와 적당히 작달막한 떨기나무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었으며 공원 맨 가를 둘러싼 조깅트랙에서는 이편의 사람들과 저편의 사람들이 구분 없이 걷고 달렸다. 공원 안쪽은 실핏줄 같은 산책로가 얼기설기 퍼져있어서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거나 가볍게 운동하기에 좋았다.
이런 K공원에도 이른바 ‘위험지대’가 존재했다. 집이 없거나,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나무 가지를 지붕 삼고 벤치를 침대 삼아 거처하는 공원 서쪽지구가 그러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가끔 정신이상자가 나타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채 돌아다니는 젊은 남자나, 애 딸린 여자만 보면 괴성을 지르며 덤벼든다는 미친 아줌마에 관한 소문이 심심찮게 돌았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밤에 공원을 지날 때면 길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다녔다.
결혼 후, 나와 남편은 공원 이편에 세를 얻었다.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앞으로도 십 년은 거뜬할 만큼 튼튼했고 둘이 살기 맞춤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작은 방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원고를 끌어안고 교정을 봤다. 그러다 눈이 피로해지면 미뤄둔 설거지나 빨래를 하고 방바닥을 쓸었다. 가끔 이도저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낮의 공원은 음전했고, 밤의 공원은 불온했다. 나는 둘 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길을 골라 한참을 걸으며 머리를 식힌 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원고를 끌어안았다. 남편이 퇴근한 후에는 함께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다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나의 삶은 평온하고, 꽤 만족스러웠다. 공원 저편에 서영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같은 과 동기인 서영은 대학 다닐 때도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 동기 모임이나 팀 과제를 할 때가 아니고서는 서로 말을 섞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녀는 어디서건 주목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고, 나는 그런 타입이 피곤한 사람이었다. 졸업 후, 다른 동기에게서 그녀가 Y시 시장의 차남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그녀다운 결혼이었다. 나에게 소식을 전해준 동기도 ‘걔가 옛날부터 돈과 명예라면 사족을 못 쓰더니, 소원 성취했다’며 고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공원 저편의 신축 아파트에 이사 온 사실을 일러준 것도 그 동기였다. 내가 너 그 동네 산다고 했더니 전화번호 좀 알려 달래서 알려줬어. 괜찮지?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설마 진짜 연락이 올까 싶었다. 아무리 같은 동네라 해도 그녀가 굳이 나를 찾을 이유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서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반갑다 얘. 나 저번 달에 여기로 이사 왔어. H캐슬 1001동으로. L한테 너 이 동네 산다는 말 듣고 나 완전 반가웠잖아. 여기, 시부모님이 사준 아파트야. 기왕이면 살던 동네에 얻어주지, 생뚱맞게 왜 여기야? 친정도 멀고 친구도 없는데. 나 신랑한테 완전 짜증냈잖아. 그래도 동네 친구 한 명은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넌 뭐하고 살아? 아, 집에서 일해? 잘됐다, 야. 우리 자주 보고 살자. 나도 요즘 만날 집에만 있어. 신랑이 일하지 말래, 몸 축난다고.
그녀는 솔 음쯤 되는 목소리로 쉼 없이 재잘거렸다. 당황스러웠다. 적당히 대꾸해주면서 머릿속으로는 서영의 의도를 열심히 추측해보았다. 쉽게 잡히지 않았다. 7년 전에 졸업한 이후로 서로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 그녀와 나 사이는 딱 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점을 내세우며 이제부터 친해지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저편과 내가 사는 이편이 얼마나 다른 줄도 모르고. 그러나 처음 그녀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나 역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빨리 만나자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바로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만나기로 한 곳은 공원 저편, 아파트 단지 앞으로 길게 조성된 카페거리였다. 7년 만에 만나는 서영은 기억 속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머릿결을 풍성하게 살린 세련된 단발머리도 여전했고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와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의 차림새도 여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에 띌 만큼 배가 볼록했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서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나 5개월 됐어.
대학 시절의 서영을 생각하면 뭔가 재잘대고 있는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만큼 서영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즐겼다. 아니, 자기 이야기만 해야 직성이 풀렸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짧은 대화가 끝난 후, 기다렸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쏟아놓는 서영을 보면서 나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현직 시장으로 계신 시아버지가 청렴한 이미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는 바람에 고급 호텔에서 결혼을 못해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 그나마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가서 위로가 됐다는 이야기, 신랑이 잘못한 일이 있거나 미안할 때마다 사준다는 명품 이야기, 신혼생활도 즐기고 일도 더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애가 들어서는 바람에 계획이 어그러져서 속상하다는 이야기, 임신하고 나니 신랑이 손 하나 까닥 못하게 하면서 공주처럼 떠받든다는 이야기, 그래도 몸매 망가지고 맥주랑 커피 못 마시는 건 짜증난다는 이야기…….
입에 모터라도 단 양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틈틈이 서영은 현란하게 손짓을 해댔고, 그때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큼직한 다이아가 번쩍번쩍 빛을 냈다. 귀는 그녀의 말소리로 어지럽고, 눈은 그녀의 다이아로 어지러웠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놨다. 그 손에는 남편이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결혼 3주년 선물로 사준 3부짜리 다이아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처음 가져보는 보석이라 고이 모셔두고 애지중지하다가 오늘 모처럼만에 껴본 것이었다. 나의 작은 다이아반지. 마음이 선득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녀의 이야기는 요즘 신랑이 한다는 일로 넘어가 있었다.
중국에 친구 이름으로 회사 하나, 이쪽에 동생 이름으로 회사 하나 차려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업 중이야. 신랑이나 아버님 이름 들어가면 괜히 신경 쓰이는 일이 많다더라고. 요즘, 돈 없이 무슨 정치를 하니? 아버님이 아무리 지방 유지래도 여기 들어가는 돈 감당하기 만만치 않더라.
가만 듣다보니 왠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쪽에 관해 잘 모르긴 해도 합법적인 방식은 아닌 듯했다. 혹시 이게 그 유명한 비자금 조성인 것인가.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늘어놓는 것도 서영다웠다. 대학 시절, 동기들이 서영의 끝없는 자기본위적 수다에 질려하면서도 그녀를 멀리하지 않았던 까닭 역시 여기 있었다. 그녀는 다분히 가변적이고 제멋대로인 기준을 가지고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넘나들었다. 자신이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면, 실제로는 그것이 비난 받을만한 일이어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뽐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못해 민망할 정도로 자기 욕망에 충실한 그 모습은 종종 실소를 일으켰다. 그래서 다들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한편으로는 묘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나 역시 서영이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도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앞으로 종종 만나자는 서영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아마 막판에 마음이 누그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고분고분 들어주는 상대가 오랜만이었던지, 그녀는 아예 시간을 정해놓고 보자고 했다. 마침 중간에 공원이 있으니 운동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머리도 식힐 겸 공원으로 종종 산책을 나간다는 말을 흘리듯 했는데 그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나는 마땅히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고, 결국 일주일에 두어 번 만나 함께 걷기로 했다.
그러나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나는 서영과의 만남이 불편해졌다. 서영이 늘 자기 스케줄에 맞춰 약속을 잡는 것도, 만나면 주야장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것도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불편함의 근원은 내 안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서영의 자랑거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와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서영을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이 출렁거렸다. 평온하고,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던 나의 생활도 덩달아 출렁였다. 작지만 아늑했던 아파트가 좁고 추레하게 느껴지고, 여태껏 나름 자부심을 갖고 해온 일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돈을 많이 벌어오지는 못해도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착한 남편마저 무능력하고 나약하게 보였을 때는, 미안하면서도 눈물이 날 만큼 절망스러웠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서영이 나타난 다음부터 내 삶에는 부족함과 결핍이 가득 넘쳐났다. 만족이 없으니 행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이 이렇게나 상대적인 것이었다니. 당황스러웠다. 무너진 마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녀에 대한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동원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녀를 보며 내가 느끼는 결핍에 비하면 도덕적 우월감 따위는 깃털만큼도 무겁지 않았다.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그녀의 세계가 나의 세계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근거와 실감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도 결핍이 있어야 했다. 그녀의 결핍을 찾아 나의 위로로 삼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서영을 내 세계에서 몰아낼 수도, 예전의 평화로운 생활을 되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Y시 시장의 아들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으며 조만간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조간신문에 실렸다. 어머, 서영이 어떡해. 나는 마치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한 양 중얼거리며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니, 어떻게 된 거니,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서영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네가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했니, 라며 얼마 전 선물 받았다는 고가의 유모차 이야기를 한바탕 했다. 그러더니 대화 말미에 앞으로 한동안은 운동 못 나갈 거 같으니 나중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모든 대답을 들은 듯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간 나는 예전처럼 지냈다. 서영이 없는 나의 생활은 조용하고 평온했으며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서영의 목소리가 사라진 동안 나는 조건자극이 사라진 파블로프의 개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달거리가 예정보다 2주 이상 늦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라는 기대가 생기자 마음이 너그러워졌는지 서영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임신 중에 신랑이 감옥에 간다면 충격이 클 텐데, 걱정까지 됐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신문을 훑어보는데 짧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Y시 시장의 아들이 건축업자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대가성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리됐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을 들고 멍하니 서있는데 남편이 다가와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나, 어쩌면 회사 다음 달까지만 다닐지도 몰라. 본사랑 통합하는데 대규모 인원 감축이 있을 예정이래.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우리 부서가 감원 1순위라니까 생각은 해두는 게 좋을 거 같아. 미안하다.
남편은 자기가 잘못해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했다.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한 뒤 남편을 배웅했다. 혼자 현관에 남아 방금 읽은 기사와 방금 들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서영이었다.
나야, 잘 지냈지? 우리 오늘부터 다시 운동하자! 나 살쪘어. 엄마가 살찌면 애기한테도 안 좋대. 몇 시에 볼래?
이른 저녁으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서영은 살이 쪘다던 그녀의 말과 달리 여전히 날씬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배만 볼록 나온 모습이 우습기보다는 자신만만하고 당당해보였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여유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불운이 그녀를 비껴가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영은 실핏줄처럼 엉긴 산책로를 걸으며 한 달 치 자랑거리를 몰아치듯 쏟아놓았다. 그동안 어지간히 참은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혹은 반사적으로 호응을 해주면서 길을 밟아나갔다. 초저녁, 여름이 지나가는 길목에 놓인 공원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싱싱했다. 내 곁에서 내 기분에 아랑곳없이 자기자랑에 신난 서영도 더할 나위 없이 싱싱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싱싱한데, 나 혼자 비린내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아랫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파왔다. 서영에게 잠깐만, 이라고 한 뒤 공원 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와 속옷을 내리는데 붉은 색이 보였다. 양변기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가랑이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검붉은 피가 실처럼 길게 늘어지며 뚝뚝 떨어졌다.
비치된 휴지로 대충 처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세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 리 없는 서영은 기다렸다는 듯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내 상태가 어떤지 말할 틈도 없었다. 쉴 새 없이 쏟아놓는 서영의 말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아랫배에 꽂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쓰러질 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장실 옆쪽에 숨듯이 놓여있는 산책로가 희미하게 빛을 냈다. 공원 서쪽 지구로 향하는 산책로였다.
서영아, 우리 오늘은 저쪽으로 가볼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는 서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나의 뒤를 따랐다. 평소에는 낮에도 다니기를 꺼려했던 곳이었지만 나는 마치 자주 다녔던 것처럼 쑥쑥 나아갔다. 떨기나무 길을 지나 전나무가 우거진 길로 들어섰다. 서쪽 지구의 시작점이었다. 서영은 전나무가 곧게 뻗어있는 길이 멋있다며,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간간이 서있는 가로등의 부연 불빛 아래, 서영의 부푼 배가 둥근 박처럼 하얗게 떠올랐다.
그때였다. 짙은 나무그늘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더니 다짜고짜 서영을 덮쳤다. 남루한 행색, 산발한 머리, 기이하게 번뜩이는 눈. 미친 아줌마였다. 이년, 죽일 년, 망할 년, 애 못 낳는 내가 그리 우습더냐, 어디 남의 신랑을 꼬여다 애까지 뱄느냐, 이년, 이년, 죽일 년.
나는 다리가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친 아줌마가 서영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에 패대기를 칠 때도, 쓰러진 서영을 마구잡이로 때릴 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나를 비난이라도 하듯 서영의 새된 비명이 밤공기를 찢었다.
안 돼, 내 아기!
절망감 어린 목소리.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 미친 아줌마를 떼어내고 서영을 잡아 일으켰다. 원피스 아래 길게 뻗은 서영의 하얀 다리 위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비명소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됐다. 비명을 지르는 것이 미친 아줌마인지, 서영인지, 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