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 그로부터 10년 뒤의 이야기
멜버른으로 여행을 오기 전부터 궁금하고 또 궁금했던 내용이 있었다.
“과연 내가 멜버른에서 10년 만에 거리 공연을 다시 한다면, 과연 이 도시에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까?”
호주에서 버스커로 활동한 6개월 동안 하루 걸러 하루는 거리에서 무조건 춤을 추었으니, 못해도 80일에서 90일 정도는 멜버른의 거리에서 관객들을 마주한 셈이다.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멜버른의 유동 인구를 감안하면, 10년 전의 나를 기억하는 관객을 다시 조우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9년 전에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서 버스킹을 할 때에는 호주에서의 나의 거리 공연을 기억하는 한 커플을 만났던 신기한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호주의 지구 정 반대편인 이탈리아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야, 10년 만에 찾은 멜버른에서 10년 전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호주로의 여행날이 가까워져 올수록 조금씩 내 마음속의 불안감이 커졌다. 10년 만에 찾은 호주에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나의 기분은 과연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야 어느 한 도시에 정착하고 나면, 5년이고, 10년이고 그 도시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니 호주도 당연히 비슷하리라 예상했었다. <이주민의 나라>라는 호주의 특수성을 전혀 계산에 넣어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주, 그중에서도 특히 멜버른이라는 도시는 취업 비자와 학생 비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도시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말인즉슨, 비자 기간이 끝나면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10년 전에 내가 이곳 호주의 멜버른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어쩌면 이미 진작에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자신들의 원래 나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전의 나는 이곳 멜버른이라는 도시에서 상모 버스킹 공연으로 제법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아직까지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적어도 한 명은 만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 자신감이 없었다고 하면, 나는 결코 이곳 호주 멜버른에서 10년 만에 거리 공연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늘은 수요일, 이곳 멜버른은 지금 겨울이고,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인지라 거리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면 covid-19의 여파로 도시의 인구가 10년 전과 비교하여 절반은 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일이고, 또 겨울이고, 또 아직 covid의 여파도 있으니, 관객이 많지 않아도 크게 실망하지 말자고 나 자신과 약속을 하였다.
오늘 처음 만난 아까 전의 인도 친구들도 이제는 자리를 떠났고, 몇몇 밤늦은 귀갓길을 하는 행인들만이 나의 공연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이라 그럴 거라며, 애써 실망해하는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10년 전의 내가 그러했듯.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나의 춤사위 옆으로 행인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간다. 때로는 팔짱을 낀 연인들이, 그리고 때로는 이제 막 저녁을 마친 서넛의 친구들이 하하호호 거리를 걸어간다. 상모를 돌리느라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는 나는 곁눈으로만 거리의 공기와 분위기를 가늠할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 백인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시더니, 뭐라고 뭐라고 말씀을 걸어오신다.
”혹시 너 10년 전쯤에 여기에서 춤을 추지 않았었어? 10년 전에도 여기에서 너처럼 특이한 모자를 돌리며 춤을 추는 사내가 있었어! “
”네? 10년 전에요? “
”응, 10년 전에! “
”10년 전이라면, 아마 그 사람이 바로 저일 거예요. 10년 전에 이 거리에서 춤을 추었던 기억들을 기념하기 위해 저는 10년 만에 이 도시를 다시 찾아왔거든요. “
”그러고 보니 10년 전의 자네 모습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군 그래 “
나는 춤을 추던 것도 잠시 잊고, 이 할아버지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 10년 사이에 멜버른이 어떻게 변하였으며, 코로나 때는 이 도시가 얼마나 조용하고 엄격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곳 스완스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대해.......
평일에 하는 공연이라 조금은 마음을 비운 상태였는데, 뜻밖의 귀한 인연을 만났다. 나는 오늘 이 거리에서 이 할아버지를 뵌 것만으로, 이번 여행의 소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금요일에 하는 공연에는 왠지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불타는 금요일은 말 그대로 불타는 금요일이니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18시간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머나먼 타국의 도시에, 10년 전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해해야 할 일일까. 자신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되찾은 피터팬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아니, 어쩌면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은 피터팬도 오늘의 나보다는 기쁘고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 호주의 멜버른에서,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그림자를 되찾은 기분이다. 지난 10년간 조금씩 조금씩 상실해 가던 어느 그 무엇, 말하자면, 젊음, 패기, 도전, 용기, 자신감, 순수함, 자존감 같은 것들을 다시금 회복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곳 호주 멜버른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나는 결코 늙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심과 순수함을 간직한 채, 나는 이곳 멜버른에서 언제나 어린 왕자와 피터팬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