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홍범도 전기
2. 현생(現生)
의사가 나의 사망을 고지 하고, 병실에는 흐느낌 소리가 가득하다.
한참 후 영안실로 옮겨지는 내 시신을 따라 병실 밖을 걷는데, TV에서 나오는 홍범도라는 소리에 온몸이 전율한다.
나도 모르게 TV로 눈이 가면서 한 인물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저 놈이 바로 내가 처단하려 했던 일본군 장교 그놈이고, 내가 무의식 속에서 보았던 것은 나의 전생이었고, 지금 영혼이 된 내가 현생의 나임을 깨달았다.
전생의 나는 원래 전전생(前前生)이었던 BC 220여년경 삼한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홍익인간이었는데, 삼한춘추전국시대의 전란 속에서 삼한 조선을 지켜 종교나라 고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중국민족과 싸우다 죽었다.
그때 나를 죽인 놈이 내가 의병활동 중 죽이려 했던 일본군 장교 그놈이었고, 그가 나를 잡기 위해 감시하다 내 아내까지 죽게 했으며, 결국 그 후로도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내가 전생에서 죽음의 순간에 떠올렸던 것이 그놈이었고, 지금 내가 노동운동가로 노동현장에서 일한 것도 저놈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단지 삼생이 지났을 뿐인데, 2,500여년의 세월이라니, 참 긴 세월을 따라다녔다. 그런데도 저 놈은 아직까지도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한국인이 되어서까지 내 나라 내 민족을 해치며 나를 욕되게 하고 있구나.
내 시신을 뒤로 하고 영안실 밖으로 나가니, 장례식장 TV에서는 아직도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내용인즉슨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시에 독립군을 학살했고, 공산주의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이다. 분명 내가 죽기 전에 보았던 내 이야기인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내 온 가족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고, 자유시에 처음 들어갈 때 내 직업을 독립운동이라 적었으며, 희망을 고려독립이라 적었다. 그런 내가 독립군을 학살 했다니...
자유시 참변은 공산주의자 들 간의 권력다툼이었고, 당시 학살당한 자들 역시 공산주의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이 있었지만, 대부분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택한 변절자였다. 한마디로 저희들 끼리 서로 해 먹겠다고 싸운 것인데,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워 그 속에 넣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 나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에 속해 있었고, 민족주의 계열에 속한 독립군들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있었기에 학살당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미처 떠나지 못해 억울하게 학살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난세에 본인이 우유부단해서 화를 당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이 학살당한 일이 없고, 나 역시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과 함께했으며, 독립운동하기도 벅찼을 때인데 무슨 이념 타령인가?
더욱이 이유란 것이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자의 흉상이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라니 이 무슨 가당치 않은 괴변인가?
사실 당시의 독립운동 현실에서 독립군 중에 공산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시 독립군 중에 중국에 있었던 러시아에 있었던 그리고 알았던 몰랐던 간에 러시아의 도움과 지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운동의 장소였던 연해주나 자유시는 러시아 영토였고, 러시아는 영국·프랑스·미국·중국 등과 함께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 싸우던 연합국가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일제의 영역을 피해 간도나 연해주와 자유시로 옮겨가며 독립운동을 하였고, 또 중국이나 러시아 영토였기에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이라 하여도 러시아의 지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군이 중국의 전격적 지원을 받은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로 대만에 진주했던 1,895년 이전까지이고, 그 이후로부터 시작하여 1,904년 러일전쟁 이후는 대부분 소련의 도움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시작이 1,910년이니, 먼 미국보다는 가까운 소련의 도움을 받을 수박에 없는 당시의 독립운동 현실에서 독립군이 공산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또한 세계가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유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동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공산주의 진영으로 재편된 것은 1947년 냉전시대가 시작된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진영이었던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다고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은 무식의 소치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백번을 양보해서 설령 그 독립군이 공산주의자라고 치자. 그래도 가당치 않은 주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관학교는 국가를 침략하는 외부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고, 군대 역시 국가를 침략하는 외부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울 병사를 양성하는 곳이다. 공산주의라도 내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면 싸울 필요가 없고, 같은 민주주의라도 내 나라를 침범하면 싸우는 것이 사관학교의 덕목이고 군대의 역할이다.
사관학교를 나온 간부들은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국방이라는 것은 나라에서 주는 월급 받으며 있는 잘 있는 나라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겨 월급은 커녕 지원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방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라, 사관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국가의 인재로 대부분이 장성이 되거나 퇴역 후 유력한 정치인이 되는데, 그들이 무슨 짓들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 대부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고, 항차 나라에서 주는 제대로 된 월급 받으며, 나라 위해 헌신하려 박봉으로 입대한 병사들에게 제 나라 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지시한 적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독립군들의 숭고한 희생을 외면한 어설픈 반공교육의 결과이다. 사관학교던 군대던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워보지 않았으면, 국방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 그런 경험이 있거나 그런 사람을 존경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간부와 병사가 있는 군대라면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를 공산주의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라고 하지만, 내가 공산주의에 가입한 것은 1927년이고, 내가 죽은 것이 1943년이며, 이미 말했듯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자본주의가 대립한 것은 1947년 냉전이 시작된 이후이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기도 전에, 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한 1950년 6.25 이전에 죽은 나를 공산주의자라니 어이가 없다.
설령 내가 6.25 이후까지 살았다고 치더라도, 당시 나는 생계와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가입했다. 이 땅에는 일제 때 나라를 팔아먹고도 자신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 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기도 전인 당시에 내가 생계와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한 필요에서 공산주의에 가입했던 것이 이렇게 모욕을 줄 정도로 잘못한 일인가.
나도 현재를 살았지만, 현재 한국인들은 참 무지하고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 알겠구나.
뭔가를 말하려면 역사를 좀 제대로 알고 말하면 좋겠다. 왜 이렇게 뻔뻔스럽고 무지한지 모르겠구나. 허긴 부모자식 간에도 죽고 죽이는 세상을 만들었으니 오죽할까? 역사를 잘못 가르치고, 잘못 가르친다고 외면해서 역사를 모르면 이처럼 무지하고 감사를 모르는 뻔뻔한 인간이 된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의 덕으로 제 나라 제 땅에서 다른 국민에게 업신여김 당하지않고 살면서 고마운 줄을 모르고, 미국 덕분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의 연합군과 함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제국주의를 제압한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일본이 제압되었으니 한민족이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과연 독립군들이 그렇게 나라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았다면, 그들이 한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순순히 대한민국을 독립시켜주었을까? 지금의 정세로 보면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을 것이고, 한반도는 민주주의 일본과 공산주의 중국이 대립하는 각축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국이 한 짓의 진실을 보라.
엄연히 임시정부가 있는데도 철저히 배격하여 한반도를 무정부 상태를 만들었고, 소련과 담합하여 남한과 북한을 나누었으며, 남한을 점령하여 친일인사들을 등용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처한 이승만을 지원하였다. 덕택에 대한민국은 친일주의자와 독재주의자의 공화국이 되었다. 해방 후 친일주의자는 반공주의자로 변했고, 미군과 이승만의 한국군과 친일경찰에 의한 무리한 반공주의로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이 저질러졌다,
미국이 한민족의 해방과 6.25 전쟁에 결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제 2차 세계대전과 남북분단과 6.25 전쟁은 미국의 자국 이익을 위한 이념전쟁의 결과였다.
1947년 냉전으로 미국의 자유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공산주의가 대립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는 이념전쟁이 없던 시기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민족주의가 먼저였을 것이고, 특히 임시정부 안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월등히 많았다. 만약 해방 당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앞에 내세웠다면, 소련 역시 이에 따라 임시정부 안에서 공산주의 인사를 찾았을 것이고, 아마도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발붙이지 못하였을 것이며, 김일성같이 독립운동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인간이 나타나나 득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와 한 덩어리로 묶여 이전의 대상이 된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나의 독립운동을 알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나는 당시 잃어버린 국가를 되찾는다거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등 거대한 어떤 이념이나 명분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무언가 좀더 이롭게 살기 위해서 일생을 싸웠다. 나를 해치기는 출생환경으로부터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사회로 나갔고, 부조리한 사회가 나를 해치기에 나를 이롭게 하려고 절로 들어갔고, 아내를 만나 서로 돕고 사는 이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살았으며, 일제가 나의 가정을 위협하기에 나와 가족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싸웠고, 일제강점기에 나의 가족을 해친 자들이 나와 같은 피를 가진 내 이웃을 해치기에 일본군으로부터 나와 내 동포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내가 한평생을 바라고 기원한 것은 그저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이 남에게 짓밟히지 않고 도우고 의지하며 서로 이롭게 사는 것이었다.
결국 나를 위해 한 독립운동이었으니, 감사는 안 해도 좋다. 그러니 제발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바라느니 내 유해와 흉상은 내가 있던 러시아 카자흐스탄 묘역 기념공원으로 돌려보내고 모두 잊어라. 가만히 잘 있는 나의 유해를 왜 굳이 모신다고 이 땅으로 가지고 와서, 패싸움에 이용하며 이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나의 이런 치욕은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마치 도둑질하다 온 양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인 것 같다. 독립군을 괴롭히고 무차별 학살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고문 경찰이 되어 이웃을 학살하며 해방된 조국 땅을 휘집고 다녀도 나만 아니면 된다고 외면하는 사회, 일신의 영달을 누리기 위해 일제에 영혼을 팔아먹은 친일파들이 활개쳐도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 공(功)보다 과(過)를 찾아 모든 것을 패싸움으로 돌리는 그런 사회를 바꾸지 않고 지나치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내 장례식장에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매일 교대로 병실을 찾던 직장 동료들 중 오늘 방문했던 몇몇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텅 빈 장례식장 안에는 나를 두고 싸우는 TV 소리만이 시끄럽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독립운동을 했던가 싶은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눈 앞에 있던 모든 것이 뿌옇게 변하면서 그 사이로 밝은 빛이 길을 만든다. 분명 저승사자가 나타나야 하는데, 밝은 길이라니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저길 끝에 다른 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겠다.
나는 홀린 듯이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며 생각한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 저 놈을 처단해야 길었던 악연이 끝나는데, 이번 생도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끝내겠구나. 빨리 다시 돌아와 모든 것을 끝내고, 정말 모두 잊고 편안히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