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소서노전기
문득 눈을 뜨니 주위에 낯선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는데, 여기가 어디이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중년의 사내와 두 명의 젊은이가 나에게 깨어나 다행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이 누군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설명에 의하면 나는 가정주부로 중년의 사내는 내 남편이고 두 명의 젊은이는 아들들이며, 경영자이자 여성 운동가 겸 사회 사업가로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3개월 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나는 깨어나기 전의 기억을 그냥 무의식 상태에서 꾼 꿈 정도로 생각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는데, 문제는 꿈이라기엔 너무나 깨어나기 전의 기억이 너무나 사실처럼 생생하다는 것과 남편과 두 아들이 남처럼 여겨질 뿐만 아니라 소름 끼칠 정도로 딱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긴 시간 동안 심리치료를 다녔고, 심리치료 과정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남편은 현직 판사로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던 하는 사람인데, 나는 승진을 위해 잘못된 판결도 서슴지 않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했고, 아이들에게도 절제된 생활과 근검절약을 강조했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가정은 내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도는 것은 물론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사회사업에 투자하는 나를 못마땅해 했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시간을 가지고 회복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깨어나기 전의 기억과 현실이 겹쳐져서 곤혹스럽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정신과 선생님이 곤혹스러워하는 나에게 최면치료를 권유했는데, 최면치료 과정에서 꿈이라고 생각했던 깨어나기 전의 기억이 나의 전생 기억임을 알게 되었고, 결국 전생의 나와 관련된 역사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시조 동명성왕-
혹 이르기를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자리를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②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시조 온조왕-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하고 간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③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④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 제1 '유리명왕'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에 가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앉아 있다가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의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임금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임금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⑤ 중국 사서 위서(魏書)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임신해 있었다. 주몽이 달아난 뒤에 아들 하나를 낳아서 자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고 했다. 자라서 주몽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였고 국사를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대를 이어 즉위했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대를 이어 즉위해서 부여를 정벌하였고 부여가 크게 패하고 마침내 통합 소속되었다.
⑥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 제1 '유리명왕’
BC 18년(유리왕 2년)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BC 19년(유리왕 1년) 9월에 동명왕이 40세로 승하하여 아들 온조가 사당을 세우는데, 태자 유리가 즉위 5개월 만에 왕이 되었다. 협보는 내정을 관장하는 대보(大輔)의 직위까지 랐다.
⑦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⑧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시조 온조왕-
13년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왕은 이 발언 2개월 후에 도읍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사의 기록이 내가 깨어나기 전의 기억은 물론 나의 최면상태에서의 기억과 일치하니 분명 나의 전생임이 틀림없다.
모든것을 알고 보니 사학가들이 남하 과정에서 “소서노, 비류, 온조 등이 남하할 때는 이를 추종하는 지지 세력들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졸본에서 미추홀과 위례성이 있는 한강 유역까지 가려면 낙랑군 등의 한사군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기록 중에는 소서노 세력과 한사군 세력이 충돌하거나 하다못해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다는 등의 내용이 없다.”고 하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역사에서 내 행적을 알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남하하여 자리를 잡았는지도 알기 어려운 마당에, 내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는 둥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나와 나를 보좌하여 성으로 들어왔던 신교(神敎) 신도(信徒)들 이야기인 것 같은데, 나는 원래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늙고 병들어 궁에서 죽으러 들어온 것이니 사실이 아니다. 신교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신망을 얻었으니 왕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런 소문이 두렵긴 했겠지만, 소문을 너무 과하게 왜곡시켰다 싶다.
사실을 깨닫고 보니 내가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지금의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전생에 죽으면서 꾸었던 염원 때문이었음을 알겠고, 지금 현생에서 하고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내가 교통사고가 나기 전에도 남편은 물론 두 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와 가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비교적 여성 인권이 보장된 지금의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 전생(前生)의 삶을 나름 잘 살았던 것 같고, 내가 여성운동가 겸 사회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태어난 이후에도 지금까지 무의식중에도 전생의 염원을 지키며 잘 살아왔으며, 내가 지금 가정주부임에도 밖으로 나돌며 경영자로 벌어들인 돈을 여성 운동과 사회 사업에 몽땅 쓰고 있는 것 역시 전생에 다 하지 못했던 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니 다행한 일이다.
남은 것은 가족들과의 관계인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연애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을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해 놓고 뒤통수를 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딱 주몽의 현신(現身)인 것 같고, 낳아주고 길러준 공도 모르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면 딱 비류와 온조의 현신인 것 같다.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정말 말 그대로 대책이 없다. 아들들이야 독립하여 좀 더 성장하면 달라지겠지만, 문제는 바뀔 가능성이 없고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 남편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는 것이 이 얽힌 관계를 잘 풀어야 당장 편히 살 수 있고, 나의 영성(靈性)이 높아져서 다음 생에 더 높은 영력을 가지고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답은 인연을 끊거나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하는데, 좀 더 많은 수양이 필요해 보인다.
어쨌던 나는 이 생(生)에서 나의 영성(靈性)이 높여서 다음 생에 더 높은 영력을 가지고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스스로 나의 생사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 진정한 행복과 영생(永生)의 세계로 나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