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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격한 여행자 Sep 10. 2021

일본에서 마라탕이 소울푸드가 된 사연

내가 마라 덕후라니!! 마라 팡인이라니!!

*뉴스레터 끼니로그의 '내가 사랑한 한끼' 연재에 소개됐던 글을 다시 게시한 것입니다. 끼니로그를 구독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에 식생활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혈중 마라 농도는 식사 메뉴를 선택하는 결정적 요소다. 일주일이 넘게 마라탕이나 마라샹궈를 먹지 못했다면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어떤 음식을 떠올려도 ‘기승전 마라’로 수렴하고 마는 위기. 대체 음식은 없다. 무조건 마라탕을 먹어야 한다. ‘마라 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을 모두 마라식(食)을 하기도 하고, 전날 저녁에 마라샹궈를 먹어 놓고는 다음날 점심에 마라탕을 먹기도 한다.


친구들은 마라가 먹고 싶을 때면 으레 내게 연락을 한다. 가게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는데, 체인별로 큰 차이점은 없다. 고수를 꼬치 메뉴처럼 1000원씩 따로 받느냐, 다른 야채와 함께 무게로 측정하느냐 정도가 다르다. 나머지는 그 지점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갈하게 재료를 준비하느냐에 달려있다. 땅콩 소스로 구수함에 힘을 주는지, 마라로 칼칼함을 내는지, 산초를 많이 넣어 혀가 찡한 맛을 내는지에 따라 취향이 갈릴 수는 있다. 하지만 약간의 포인트를 빼고는 얼추 한국인 입맛에 맞춰 개조돼 있다.


그래도 한 곳만 꼽자면 우리 동네 마라탕 가게다. 포인트를 마늘에 둬 한국인이 좋아하는 깊은 감칠맛을 살렸다. 지인 만족도 100%다.


마라샹궈와 궁합은 꿔바로우보다 개인적으로 족발이 최고다. 순대도 나쁘지 않다. 마라탕과 샹궈에 고기 넣는 대신 따로 먹는게 더 좋다. 배달로 먹을 때 강추.


‘마라 팡인’된 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짧고도 길었던 일본 생활에 다다른다. 한국에 마라 음식점들이 늘면서 이제 막 흥미를 느낄 때쯤 일본으로 1년간 공부를 하러 가게 됐다. 여행으로 배운 일본은 싸고 맛있는 음식이 어디에나 있는, 식생활 시차라고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던 곳. 하지만 신라면을 표준시각으로 맵기를 따져온 한국인이 삼시 세끼, 일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1년을 매일 일본식으로 때우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생활인으로 살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조합의 나물 반찬은 일본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고추장도 무려 순창이 들어있지만 그 어디에도 매운맛은 1도 없어서 잘 안먹게 된다...

현재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 붐은 참으로 강력한 바람이어서 어느 마트에나 신라면과 둥지냉면, 고추장, 쌈장 그리고 떡볶이 재료까지 준비돼 있다. 김치도 대형 점포는 라인업이 10가지 이상이고, 비빔밥용 삼색 나물(콩나물, 시금치, 무채 등)도 웬만한 반찬 코너에는 다 있다. 


문제는 라면 같은 완제품이 아닌 이상 김치를 비롯한 한식은 겉모습만 한국식이라는 점이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 대신 설탕을 넣은 듯한 ‘한류 메뉴’는 절대적으로 매운맛이 부족하다. 그래도 먹으면 먹을 수는 있지만, 같은 값이면 양도 더 많고 맛있는 현지식이 있다. 급하면 대용식은 되지 않느냐고? 한 가지 예를 들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 본다.

간장을 메인으로 맛을 내고 간을 맞춘 일본 반찬들. 두부조림과 야채조림, 곤약야채조림, 꼬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아파트 1층 마트에 같이 장을 보러 갔는데, 대부분이 잘못된 선택을 저지르곤 했다. 정갈하고, 예쁘게 조려놓은 야채 조림을 집어 들고 마는 것이다. 감자, 연근, 당근 등을 참으로 먹음직스럽게 썰어 간장에 조린 그 메뉴는, 결국 한입 베어 물고 남은 조각을 앞접시에 내려놓는 것을 끝으로 두 번 다시 젓가락이 향하지 않게 된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이 잔반을 처리하는데 정말 애를 먹었다. 마늘 없이 간장을 베이스로 간을 한, 달큰하고 찝찔하면서도 밋밋한 그 맛에는 한국인이 견딜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단순히 맛이 없다거나, 좋아하지 않는 맛이 아니다. 불닭볶음면 소스를 털어 넣어야 할 것 같은 어색함이다. 맛의 표준시각이 ‘맵기’에 달려있어 오는 고충인데, 일본식 끼니가 쌓일수록 더욱더 매운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 효과가 있다.


동병상련 동네 중국 친구들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천 음식 먹으러 가지 않겠어?” 한국인을 울리는 맛을 보여주겠다며 데려간 가게는 마라와 산초 베이스 국물에 반죽을 칼로 슥슥 베어서 던지듯이 넣은 도삭면이 점심 메인 메뉴인 곳이었다. 일본 말로 마라는 ‘저린 매운맛’(シビ辛)이라고 한다. 국물을 쭉 들이켜면 혀끝이 찡 한 데 이때 찬물을 마시면 갑자기 짠맛이 느껴지는 듯한 자극이 온다. 이 맛에 마라를 먹는 것 아닌가!

치파오(七宝) 마라탕은 봉지에 소분된 재료를 하나씩 골라 담는다. 맵기 3단계 이상은 노엄두;(왼쪽) 고추 매움 그리울 때 강추. 시안(西安)도삭면은 걸죽한 마라에 산초가 포인트.

게다가 한 그릇에 부가세 포함 850엔(당시 소비세는 8%였다). 순두부찌개 먹으러 매일 40분을 넘게 지하철을 탈 수도, 1000엔이 넘는 김치찌개를 매일 먹을 수도, ‘엽떡’ 기본 세트를 2680엔 주고 주문할 수 없었던 유학생에게 마라 도삭면은 자극적이면서도 매운맛으로 느끼함을 상쇄해 주는 ‘소울푸드’가 됐다.


가게를 소개해 준 답례로 중국 친구들을 데리고 3차 한류 붐(현재는 4차 붐이 불고 있다)의 중심에 있던 치즈 닭갈비를 먹으러 ‘백주부’의 철판 전문점에 갔다. 한국의 매운맛은 사천 출신도 감당하지 못해 눈물을 쏙 빼어버렸고, 닭갈비는 내가 다 먹고 친구들에게는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치킨을 따로 시켜줬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마라 기행’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어져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자극이 됐다. 그리고 타국에서 만난 인연을 떠올리는 맛이 되었다. 이 길고 긴 코로나 터널이 끝나면 사천 요릿집에서 다시 만나면 마라 도삭면 한 그릇에 한참 수다를 나누고 싶은, 먹고 있어도 또 그리운 맛이다.




*뉴스레터 끼니로그의 '내가 사랑한 한끼' 연재에 소개됐던 글을 다시 게시한 것입니다. 끼니로그를 구독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에 식생활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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