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평의 해안선

낯선 곳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다는 것

by 우동이즘
KakaoTalk_Photo_2025-03-19-16-23-17 002.jpeg


‘한 평의 해안선’은 좋아하는 만화 <헌터X헌터>에서 나온 말이다.

제주도에서 구한 첫 숙소에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 평의 작업실’

한 평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숙소는 아담했다. 조금 넓은 원룸정도 될까?

이 숙소를 계약한 이유는 한쪽 벽면 가득한 통창 때문이었다.

그 창을 열고 나가면 작은 정원이 있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정원.

이곳에는 ‘한 평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제주로 내려온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중 첫 번째는 명상이었다.


한 평의 정원은 명상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사람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 들리는 학교 종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 방 안에 작게 틀어 둔 음악소리,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제주로 내려온 두번째 목적은 책 집필이었다.

하지만 ‘한 평의 작업실’은 그다지 좋은 집필 공간은 아니었다.

작업에 필요한 긴장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져온 책상이 흔들리고 삐걱거려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결국 작업하기 편안 카페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KakaoTalk_Photo_2025-03-19-16-23-16 001.jpeg


숙소는 조천읍에서도 한참 안쪽이었는데, 작업을 할만한 큰 카페는 함덕까지는 걸어 나가야 했다

네이버 지도로 거리를 재보니, 편도 4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운전을 해서 갈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겨울이지만 남쪽 지방이라 기온 자체는 그리 낮지 않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걷다 보면 조금씩 땀이 난다.

바람이 거세게 불지만 극한 환경까지는 아닌 것이다.

차분히 쌓인 돌담,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거리, 정갈한 바다, 이국적인 야쟈수, 색 바랜 네덜란드 풍 건물.

예쁜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그러다보면 어선들이 정박되어 있는 작은 만이 나온다.

내륙 쪽으로 움푹 들어온 만,

여기서부터 길은 크게 구불거리는데,

이 곳만 넘으면 멀리 함덕 해수욕장이 보인다.


조용했던 거리가 관광객을 위한 활기넘치는 거리로 바뀐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식당들, 카페, 기념품 샵.

어디까지 걸어야 일하기 좋은 카페를 찾을 수 있을까?

관광용 카페와 작업용 카페는 공기가 다르다.

인터넷 정보를 참고할 수 없다.


내가 주로 가던 카페는 의외로 관광지 한가운데 있는 곳이었는데,

한쪽 벽면이 바다를 향해 모두 뚫려 있는 카페였다.

창문 앞으로는 길게 바 형태의 테이블이 있는데,

그 자리는 오랜시간 앉아 있어도 그리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였고 겨울이었다.

관광객은 드물었고 카페는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다.

창 밖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보다 보면 조금 무서워지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여기가 섬이라는 게 자각되었다.


추위에 떨며 일을 했던 탓일까,

밥을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허기가 진다.

아직 날은 저물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쁜 노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카페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오자 얼음장 같은 바람이 외투 속을 파고든다.

하늘은 꾸물꾸물 검은 소용돌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

노을에 대한 기대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옷깃을 여미고 발길을 재촉한다.

돌아가는 길은 정오의 출근길과 사뭇 다르다.

두 번의 해안도로를 지나 집으로 가는 언덕길에 다다른다.


한 평의 해안선을 발견한 건 그 무렵쯤이다.

정오 때 눈여겨보지 않은 작은 백사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명이 나란히 누우면, 남은 여유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은 백사장.

삐죽 튀어나온 모래사장에는 파도가 규칙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모래는 촉촉해졌다가 메마르기를 반복한다.

특별히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은 아니지만자꾸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힘이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언덕을 올라야 한다.

숙소로 향하는 언덕에는 가로등이 없다.

해안선, 하나둘 켜지는 오징어 배의 불을 가로등 삼아 깜깜한 길을 헤쳐 나간다.

문을 열고 들어 선 숙소는 후끈, 온기가 얼굴을 밀어낸다.


한 평의 작업실, 한 평의 정원, 한 평의 해안선.

낯선 동네, 작은 내 공간을 찾은 후에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행복에 닿을 수 없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