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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Feb 29. 2024

장오이.

High Hopes - Kodaline

장은 오래된 별명이 있다.


윤은 장을 오이라고 불렀다.

장의 얼굴은 길다면 길고, 적당하다면 적당했다. 장이라는 한자어(길 장)를 연상케 하고, 팔다리도 길쭉하다.

그래서 윤은 장을 ‘오이’라고 불렀다.


내가 왜 오이야?

네가 얼굴이 길어서.


윤은 장을 오이라고 불렀다.


장은 자신이 오이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

윤은 장이 싫다고 해도 오이라고 불렀다.


*


가정이 유복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윤은 끝내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았다.

화장, 화장은 너무나 동그란 얼굴을 감추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새로운 세계였다.


윤은 화장을 한다.

백탁 현상이 일어나는 선크림을 한 겹, 비비크림을 한 겹, 회색 아이브로우로 갈매기 눈썹을, 쉐딩으로 콧대를 세움과 동시에 동그란 볼살은 날렵하게 쳐냈다.

마지막은 쥐 잡아먹은 체리색 틴트를 중지손가락으로 적당히 펴 발랐다. 손가락에 남은 붉은 기는 볼에 비볐다.


*


윤은 장의 포니테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장이 방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윤은 귓등으로 듣고 장의 비단 같은 머리를 만진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틴트로 자신의 입술을 치장하던 윤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는 게 불결하다고 장은 생각한다.

빨갛게 착색된 손 끝은 펄이 들어있는 하이라이트라도 만졌는지 반짝인다.

장은 윤에게 만지지 말라고 한다.


윤은 장의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한다.

아랑곳 않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제 머리처럼 만지는 윤을 흘겨보고

장은 바르게 앉아서 칠판에 적힌 판서를 교과서 모퉁이에 필기한다.

윤은 책상에 엎드려서 장의 펜 끝이 흔들리는 걸 바라본다.


*


윤은 장이 꽤 괜찮은 애라고 생각한다.

장은 수업시간에 졸지도 않고 바르게 앉아서 선생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한다.

배움이 전부인 것처럼, 배움이 생의 목적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는 장의 미래는 칠판 너머에 있는 것 같다.

윤의 미래는 거울 속에 있는데. 윤은 장의 입술을 바라본다.

혈색이 있지만 윤의 새빨간 입술색에 비해 칙칙한 톤의 장의 입술을 보며 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고 싶다.


“야, 오이!”

윤은 장에게 화장을 해주겠다 한다.

장은 거부했고, 윤은 아쉬워한다.

장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자신이 경험한 멋진 세계를 인도해 줄 텐데.


장은 윤의 화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입술은 새빨갛게, 얼굴은 창백하고 하얗게, 눈썹은 송충이처럼 두껍게.

하루의 반나절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윤이 한심하다.



자신을 오이라고 부르는 윤이 싫다.

“장오이.”

언젠가부터 주위 몇몇도 재미있어 보이는지 윤이 부르는 것처럼 장을 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멸감을 언젠가 윤에게 되갚아주리라고 장은 결심한다.


*


장은 윤이 한심하다.

윤에게 이런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장은 무례한 윤이 싫기 때문에, 똑같이 무례하고 싶지 않아서 윤이 싫다는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윤의 책상에는 틴트, 팩트, 비비크림, 수분크림이 자유분방하게 배열되어 있다.

이따금씩 장의 책상에도 윤의 물건이 넘어온다.

장은 윤을 그만 미워하고 싶다.


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만지는 게 싫다.

수업시간에 엎드려서 키티 손거울 속 자신의 피부를 살펴보는 것도 한심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오이라고 놀리는 게 싫다.


*


장은 어느 순간 윤이 자신과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장이 윤을 싫어하게 되면서, 윤의 말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장이 오이라는 윤의 관념이 장 자신에게도 옮아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윤이 장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윤이 하는 재수 없는 소리나 헛소리도 지나가는 바람처럼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

윤은 장에게서 의미를 획득했다.

장은 윤의 짝이었고, 뒷자리였고, 앞자리였다.

지구와 달, 지구와 태양인 것처럼 자리 뽑기마다 장과 윤은 가까이에 있었다.


수업시간에 엎드려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윤.

깨우면 짜증 내고 거울 속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

너무 한심해서 바라보기도 싫은 윤.

무엇보다 자신을 오이라고 부르고, 얼굴이 길다고 놀리는 윤.

나에게서 의미를 획득한 윤.

나를 화나게 만드는 윤.


장은 윤에 대해 생각할수록 윤과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만 강렬해진다.


*


장은 윤에게 말한다.

너, 네 얼굴 정말 동그래. 정말 동그랗고 커다란데 달덩이다. 아니, 소보루인가?

윤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해진다.


어떤 뜨거운 김이 오르면서 윤의 얼굴은 찐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다.

윤의 피부가 얇게 찢어지기 시작한다.

윤, 어때. 네 기분이. 싫어하는 별명으로 불리는 기분이,


*


장은 윤의 꿈을 꾸고 나서 이제 더 이상 윤에게 마음 쓰기도 싫어졌다.


윤은 윤대로, 장은 장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수업시간에 키티 손거울로 자신의 여드름을 어떻게 커버할지 고민하는 윤대로, 선생의 말을 성실하게 교과서 모퉁이에 적어 내리는 장대로.

윤은 윤대로, 장은 장대로.


*


윤은 여전히 장을 오이라고 불렀다.

윤은 장이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한다.

장에겐 콤플렉스 따위 없는,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괜찮은 애.


윤은 장을 오이라고 불러도 ‘하지 말라고.’라고만 말하는 장의 말을 무시했다.

오이.

그게 뭐라고.

윤이 장을 오이라고 부른다고 장이 오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오이라고 부르면 재미있잖아, 장의 반응이.


*


중학교 3년을 마치고, 지겨웠던 장과 윤도 각기 다른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했다.


종종 윤은 장의 좋은 모습이 떠올라서 보고 싶다, 따위의 문자를 보냈다.

장은 윤의 문자를 무시했다.

윤은 장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람이 되었다.

과거에 윤이 장을 오이로 만들었던 것처럼, 장도 윤을 바람으로 만들었다.


종종 장은 생각한다.

윤이 오이라는 별명을 애정을 담아 불렀다는 게 사실이어도,

윤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고 오이라는 별명이 자신의 얼굴 특징을 과장해서 붙인 이름임을 알기에 장이 윤을 좋아할 수 없는 건 자연스럽다.


장오이.

오이.

장은 오이를 좋아한다.


어쩌면 장은 그냥 윤이 싫었다.

이젠 싫어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한다.

윤은 그냥 의미 없는 인간이다.

장은 장대로, 장이 좋아하는 사람들만 신경 쓰고 살기에 바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장은 오이를 싫어하게 됐을 수도 있다.


*


윤은 장을 오이라고 놀린 걸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장을 좋을 대로 부른 것일 뿐인데, 그게 뭐 큰 일이라고.


윤은 장이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비로소 완벽해졌지만 윤은 종종 뼈저리게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라고 느꼈던 학창 시절 인물은 장이 강력하다.

장오이. 내 친구 장오이.




========


글을 다 썼는데 삭제버튼을 눌러버렸습니다.

실수로 지우는 경험은 참 오래간만인데 다시 써보니까 비슷하게 써지는군요.

처음에 썼던 글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습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도 있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비슷하게 복구되는 것 같습니다. 신기한 경험이군요.






매거진의 이전글 남들은 다 괜찮은데 너만 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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