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썸머> 2021년
영화 <건축학개론>(2012)
<500일의 썸머>는 2009년 개봉한 미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마크 웨브 감독의 데뷔작으로 장르는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이며 15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시간은 95분이다. 운명적 사랑을 믿는 남자 톰과, 모든 것이 특별한 여자 썸머와의 연애이야기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은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축과 인간의 행복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영화의 주인공 톰은 건축가를 꿈꾸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설계하고 지을 수 있다면 세상에 기쁨과 의미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썸머에게 건네주는 책이 <행복의 건축>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본 영화는 허구임으로,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더라도 완전히 우연이다. 특히 너 제니 벡맨. 나쁜년”이라는 자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영화의 공동 작가인 스콧 뉴스태터가 실제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일층의 판석들은 노령과 나이든 우아함을 이야기한다. 반대로 부엌 진열장의 규칙성은 위협적인 느낌은 주지 않는 질서와 규율의 모범이다. 커다란 미나리아재비가 인쇄된 매끈한 탁자보가 덮인 식탁은 그 옆의 엄격해 보이는 콘크리트 벽 때문에 더 장난스러워 보인다. 층계를 따라 걸려 있는, 달걀과 레몬을 그린 작은 정물화들은 일상적인 것들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창턱 유리 항아리에 곶힌 수레국화는 우울의 흡인력에 저항하도록 힘을 보태준다. 위층의 텅 빈 좁은 방은 회복을 꿈구는 생각들이 부화하는 공간이다. 천창은 크레인과 굴뚝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초조한 구름들을 향해 열려 있다.
이 집이 그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P11)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덧없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이탈리아의 백운암 산맥을 산책하던 일을 회고한다.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꽃들이 만발하고 초원 위에서는 화려한 색깔의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야외에 나와 기뻤다(그 주 내내 비가 내렸기에). 하지만 그의 동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산책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릴케가 주변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나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릴케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 겨울이 오면 사라진다는 것.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릴케에게 공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곧 스러질 것이라 하더라도 뭔가 매력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건강성의 증표였다. 그러나 릴케의 입장은 비록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특히 아름다움의 덧없는 본질을 의식하고 또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 있다는 점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런 우울한 열광자들은 커튼 조각에서 좀이 먹은 구멍을 보고, 설계도에서 폐허를 본다. 그들은 부동산업자가 보여준 집만이 아니라 도시와 문명 전체가 곧 벽돌 조각들로 박살나 바퀴벌레만 의기양양하게 기어다닐 것임을 깨닫고 막판에 계약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차라리 방 하나를 빌려 살거나 통 속에 들어가 살 수도 있다.
반대로 건축을 향한 열정이 극에 이르면 유미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박물관 경비원처럼 눈을 부릅뜨고 집을 살피거나, 손에 젖은 걸레나 스펀지를 들고 얼룩을 찾아 방마다 순찰을 해야 적성이 풀리는 괴상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미주의자는 어린아이들과 벗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는 혹시 누가 무심결에 머리를 뒤로 기대 벽에 자국을 남기지나 않을까 안달하느라 대화는 흘려들을 수밖에 없다. (P16-17)
따라서 건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독특하면서도 힘겨운 요구가 따라온다. 우리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우리 자신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설사 주위가 다 비닐 소재라 개량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가 불편하게도 벽지의 색깔에 취약하며, 불행한 침대 커버 때문에 우리의 목적의식에서 탈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동시에 건물은 우리의 불만을 아주 조금밖에 해결할 수 없으며, 악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건축은 아무리 성취도가 높다 해도 늘 작은 부분을 구성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며(값이 비싸고, 파괴되기 쉽고,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현 상태에 저항한다. 더욱 거북하게도 건축은 우리에게 행복은 종종 과시할 수 없는, 영웅적이지 않은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넓게 펼쳐진 오래된 마루 널에서나 석고 벽에 밀려드는 아침빛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극적이지 않은 또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의 장면들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 뒤에 놓인 더 어두운 배경을 우리가 의식하기 때문이다. (P27)
그런 미세한 변화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 스위스의 사이비 과학자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의 필생의 작업이었다. 그의 네 권짜리 <인상학>(1783년)은 이목구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의미를 분석하고, 턱, 눈구멍, 이마, 입, 코의 모습을 선화(線畫)로 수도 없이 묘사한 뒤, 각 그림에 그것을 해석하는 형용사를 붙여놓았다.
우리는 살아 있는 형태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연역해내는 데 익숙하며, 이런 습관 때문에 경쟁하는 건축 스타일로부터 서로 다른 강렬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단 1밀리미터 차이로 둔감한 입과 자비로운 입이 갈라진다면, 창문의 형태나 지붕 선의 차이로 느낌이 확 달라지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구별하는 것처럼, 함께 살아가는 사물의 의미를 구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건물이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 정면에서 희미하게 연상하는 생물이나 인간의 기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건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형태일 경우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특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건축 작품에서 찾는 것은 결국 친구에게서 찾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대상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른 모습인 셈이다. (P92-93)
두 의자의 등받이 버팀대를 생각해보라. 둘 다 어떤 분위기를 표현한다. 곡선 버팀대는 편안함과 장난스러움을 이야기한다. 직선 버팀대는 진지함과 논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 다 인간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추상적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질을 나타낼 뿐이다. 직선적인 나무의자는 안정되고 상상력 없는 사람이 자신의 생활 반경 내에서 행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곡선을 그리는 의자의 구불구불한 모습은 간접적으로나마 구김살 없고 멋을 부리는 사람이 드러내는 편안한 우아함에 상응한다.
인간은 심리적 세계를 외부의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언어에 비유가 생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뒤틀렸거나 어둡다고, 부드럽거나 단단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음울하게 푸르른 분위기에 빠져들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콘크리트 같은 물질이나 부르고뉴 같은 색깔에 비유할수 있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개성의 어떤 면을 전달할 수 있다.
독일의 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은 학생들에게 선만을 이용해 좋은 결혼과 나쁜 결혼을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 결과로 나온 구부러진 선들로부터 아른하임의 지시 사항을 거꾸로 추측해 올라가는 것은 매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다가갈 수는 있다. 이 선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관계의 특질의 어떤 면을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곡선은 사랑이 담긴 결합의 평화롭고 물 흐르는 듯한 과정을 반영한다. 반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스파이크가 나타난 선은 상대를 비꼬고 기죽이는 말대꾸나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는 행동의 시각적 속기 역할을 한다. (P94-95)
그러나 그런 사전이 있다 해도, 건축물이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에 주석을 다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그 자체로는 어떤 건물이 어떻게 아름답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감탄하는 건물은 결국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가 귀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상찬한다. 즉 이런 건물은 재료를 통해서든, 형태를 통해서든, 색체를 통해서든, 우정, 친절, 섬세, 힘, 지성 등과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긍정적인 특질들과 관련을 맺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서로 얽혀 있다. 우리는 침실에서 평화를 연상하려 하고, 의자에서 관대와 조화의 비유를 찾고, 수도꼭지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분위기를 구한다. 우리는 우아하게 천장과 만나는 기둥. 지혜를 암시하는 낡은 돌계단. 부채꼴 채광창으로 장난스러움과 예의바름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지 왕조 시대의 문간에서 감동을 받는다.
시각적 취향과 우리의 가치 사이의 친밀한 제휴를 가장 투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스탕달이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그의 경구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미학에 관한 학문적 몰두와 구별하고, 대신 그것을 우리가 전인으로서 윤택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특질들과 통합해주는 미덕이 있다. 행복의 추구가 우리 삶의 밑바닥에 있는 과제라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암시하는 핵심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탕달은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 꽤나 복잡하다는 점을 예민하게 의식했기 때문에, 지혜롭게도 특정한 스타일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일은 삼갔다. 사실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허영이 우아만큼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호전성을 존경심만큼이나 흐임롭게 느낄 수도 있다. (P104)
우리가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건물이나 가구가 행복의 여러 측면들을 환기시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단지 왜 우리에게 그런 환기가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존엄과 명료 같은 특질들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위의 물건들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우리 환경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왜 중요한가? 왜 건축가들은 특정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하는 건물을 굳이 설계하며, 왜 우리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암시가 울려퍼지는 장소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가? 왜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이 하는 말에 약한가, 그렇게 불편할 정도로 약한가? (P110)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가장 많이 고려한 것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는 우리가 잠들 수 있는 곳은 거의 짓지 않으면서도, 집을 필요로 하는 우리 마음에는 가장 큰 공감을 보여주었다.
종교적 건축의 원리 자체가 우리가 있는 장소가 우리가 믿는 것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관념에 기원을 두고 있다. 종교적 건축의 옹호자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어떤 신조에 헌신하다고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도, 건물을 통해 계속 확인을 받지 못하면 실제로 헌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 때문에 부패하고 사회에서 교제하는 바람에 길을 잃고 방황할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외부의 가치들이 내부의 갈망을 고무하고 강조해줄 장소가 필요하다. 우리는 벽이나 천장에 표현된 것 때문에 신에게 가까워질 수도 있고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가장 신실한 부분에 늘 진실하려면 금과 청금석으로 칠해 놓은 판벽, 색깔을 칠해 놓은 유리창, 흠 하나 없이 갈퀴질을 해 놓은 자갈 정권이 필요하다. (P112)
예술의 이상화 이론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진 건축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선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수준 높은 예술은 이념에서 자유로우며, 순수하게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전’이라는 말은 어떤 학설이나 믿음의 장려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부정적 함의가 없다. 그런 장려의 대상이 주로 밉살스러운 정치적 상업적 의제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 그것은 그 말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우연이다. 예술작품은 그 자원을 이용해 우리를 뭔가로 이끌 때,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관념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우리의 감수성이나 마음 자세를 고양시키려고 할 때 하나의 선전이 된다. (P152)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
1907년 독일의 젊은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런 변화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해 보려했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인데,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될 수도 있다. 수천 년 동안 추상 예술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콩고, 말리. 자이레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바로 그의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벽두에 서양에서 다시 두드러진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추상예술은 대칭, 질서, 규칙성, 기하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조각이든 양탄자든, 모자이크든 도자기든, 파푸아뉴기이의 웨와크에서 바구니를 짜는 사람의 작품이든 뉴욕 화가의 작품이든 추상 예술은 평평하고 반복적인 시각적 평면들을 바탕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창조하려 하며, 전제척으로 살아 있는 세상에 대한 암시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P163)
아름다운 것에 대한 느낌을 두고 벌어지는 충돌과 진화는 고통스럽고 대가도 클지 모르지만, 그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예를 들어 만장일치로 또는 영원히 매력을 자아낼 수 있는 의자와 찬장을 만들 가능성은 적은 것이다. 취향의 충돌은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파편화하고 고갈시키는 세계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사회와 개인에게 역사, 즉 변화하는 투쟁과 야망의 기록이 있는 한, 예술도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 이 예술의 역사에는 늘 사랑받지 못하는 소파, 집, 기념물의 형태로 사상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도 취향의 스펙트럼에서 계속 새로운 부분, 새로운 스타일로 이끌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이 현재 우리 내부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집중된 형식으로 구현할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선언하게 된다. (P178)
이런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질서와 복잡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배후에 위험이 존재해야만 안전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듯이,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있다. (P203)
우리는 질서와 복잡성의 병치에서 생기는 즐거움 밑에서 이와 관련된 건축학적 미덕인 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과 수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대립들을 건축가들이 능숙하게 중재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피어나는 것 같다. (P207)
인간은 사물을 부수어버리는 데 놀랄 만큼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종이다. 그래도 가끔 아무런 실용적인 이유 없이 우리 건물에 이무기돌이나 꽃줄. 별이나 화환을 덧붙이며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런 장식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서는 물질로 기록된 선의. 응결된 자비를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인간 본성에는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런 우아한 손길을 보면 우리가 실용적으로 사리를 분별하기만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익이나 권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가끔은 돌에 수도사를 조각하고 벽에 천사를 새겨놓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세부 장식을 조롱하지 않으려면 실용주의와 호전성의 측면에는 자신이 있어. 그 반대가 되는 연약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향도 인정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허약함이나 퇴폐를 위협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부드러운 면을 찬양하는 태도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P226)
이런 현대적이면서도 훌륭한 거주지 가운데 다른 예들 역시 일본인이 전통적으로 좋아했던 물질적 불완전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어떤 주말 별장의 묵직한 바깥벽은 녹이 슬어가는 거친 쇠로 이루어졌으며, 이끼와 물 때문에 얼룩덜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얼룩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배수관을 이용해 이 재료를 보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외려 자연이 인간의 작품을 공격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보다 오래된 찻집의 건축가들은 거의 같은 이유로 나무에 광택제를 바르지 않고, 이로 인해 생긴 오래된 느낌과 세월의 흔적을 귀중하게 여겼다. 그들은 이것을 만물 무상의 지혜로운 상징으로 보았다. 다니자키 준이로는 <그늘 예찬>(1933년)에서 자신과 동포들이 왜 흠을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는지 설명하려 했다. “우리는 빛나고 반짝거리는 것들에서는 사실 편안함을 느끼기 힘들다. 서양인들은 은과 철과 니켈 식기를 사용하고, 그것들이 반짝거릴 정도로 광택을 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관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도 가끔 찻주전자, 병, 술잔을 은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광택을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광택이 사라질 때부터, 어둡고 뿌연 녹이 슬기 시작할 때부터 비로소 그것을 애용하기 시작한다.” 불교의 글들은 나무나 돌의 불완전한 면을 참지 못하는 태도를 존재에 내재하는 실망스러운 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연결시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실망스러운 면이나 쇠퇴와는 달리 건축 재료에서 드러나는 그런 결함은 매우 우아해 보인다. 나무와 돌, 그리고 현대의 콘크리트와 나무는 천천히 위엄 있게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리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며 부서지지도 않고, 종이처럼 찢어지지도 않는다. 다만 우울하게, 고귀하게 변색될 뿐이다. 이 주말 주택의 녹이 슬고 얼룩이 진 벽은 쇠퇴와 도덕성에 관한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매우 예술적인 그릇이 되었다.
전통적인 건축 스타일의 성공적인 현대적 재해석은 우리를 미학적 수준에서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여러 시대와 나라를 종합할 수 있다는 것,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의지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선례와 지역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의 위대한 집들은 자신의 젊음을 행복하게 고백하고 현대 재료의 발전의 혜택도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또 선조의 매혹적인 주제에도 반응하며, 그렇게 해서 잔인할 정도로 빠른 변화의 시대에서 얻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생색을 내려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과거와 우리 지역의 귀중한 것들을 가지고 세계화된 불안한 미래로 들어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