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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

영화 <박열> 2017년

by 노용헌

우리들은 너희들의 끊임없는

제국주의적 야심의 희생이 되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의 약속에 의해

태어났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운명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그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우리들은 이처럼 잔인한 운명에 대하여

순종할 수는 없다.

-박열, ‘한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게 전한다’에서-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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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주소로는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다.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유아기에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샘골로 이사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샘골은 5,6가구밖에 되지 않는 한촌이었다. 맑은 개울이 흐르는 이 작고 평온한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화목한 3남 1녀의 막내로 온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박열은 훗날 일본 감옥에서 아내 가네코 후미코에게 자신의 고향과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가네코의 자서전에 나온다. (P11)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0대 초반에 이미 박열은 상당한 반일의식을 갖게 된다. 박열은 서당에 다니던 시절에는 유교적 유습에 반감을 가졌으나,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호기심으로라도 조선시대의 고전들을 읽고 싶었다고 후일 법정에서 진술한다. 특히 졸업을 얼마 앞둔 1916년 초, 젊은 조선인 교사 이순의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한 말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를 용서해라. 나는 일본이 우수하고 일본이 조선을 하나로 묶어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너희들에게 가르쳤다. 반면 조선은 못나고 힘없는 나라로 일본에 합쳐져야 마땅하다고 가르쳐왔다. 그런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내 목숨을 지키려고 비겁한 마음에서 내가 이제까지 너희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 교육을 했다. 조선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교사는 경찰서의 형사나 다름없다.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조선 민족은 일본 민족보다 훨씬 우수한 문화를 지켜왔다.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박열은 울면서 말하는 이순의 선생에게 큰 감명을 받았노라고 나중에 법정에서도 진술했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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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경성고보 교사 과반수는 소학교 교사 수준이었으며 남자 교사 대부분이 저능했다고 진술한다. 그럼에도 그에게 영향을 끼친 교사들도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서 고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고보에 부임해온 일본인 교사였다. 심리학을 가르치던 그 일본인 교사는 당시 금기사항이던 ‘대역사건’에 대해 말해준다. 1911년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辛德秋水)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 왕과 가족을 살해하려 모의하다가 26명이 체포되어 12명이 처형되고 5명이 옥사하거나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기사화하거나 이야기하는 자체를 금지시켰는데 심리학 교사는 대역사건에 대해서 뿐 아니라 천황제의 문제점과 무정부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했다. 조선에 고등관으로 부임해 왔던 그는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판임관으로 강등되고 학교에서도 창가담당으로 바뀐다.

일본인 역사 교사도 박열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세계인이라 말하며, 프랑스에 정복당했던 독일이 투쟁을 통해 독립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1905년 러시아에서 제1차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 후, 다양한 진보 사상이 일본의 지식인들을 통해 조선까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러시아의 제1차 혁명은 실패했으나 신분차별에 기초한 봉건적 억압과 초창기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착취에 저항하던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운동이 가진 또 다른 전체주의적인 집단주의와 그 폭력성에 반발한 무정부주의자들도 양산되고 있었다. 무정부주의는 도덕과 이념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공산주의까지 넘어선, 국가제도 자체가 소멸되어 어떠한 통제도 없이 만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는, 보다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P32-33)


끔찍하게 곤궁한 유학생활이었다. 맨손으로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은 했으나 학비와 생활비 조달이 문제였다. 조선 엿을 파는 엿장수, 신문배달, 공사장 막노동, 우편배달, 얼음공장 노동자, 인력거꾼, 중국식당 배달부, 야간경비, 점원, 인삼 행상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박열만이 아니었다. 일본 유학생 중에는 대지주나 친일파 고위층의 아들딸도 있었으나 대개는 지방 중소지주의 자녀들로 넉넉하지 못한 처지였다. 박열처럼 빈손으로 도일해 가족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고학생도 많았다. 정규대학에 입학하기도 쉽지 않았거니와 전문학교나 학원을 다니고자 해도 월사금 형태로 내야 하는 비싼 학비를 조달하지 못해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이가 대다수였다.

아직 친일재벌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 우국지사들이 기금을 모아 창간한 ‘동아일보’에는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연재되고 레닌에 대한 우호적인 사설이 실릴 정도로 사회주의에 호감이 높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당대 세계의 온갖 사상과 문화가 몰려드는 동양의 관문인 도쿄의 분위기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진보의 첨단으로 이끌었다. 박열 역시 일본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고생하면서도 20세기 초반의 세계를 뒤흔든 사상과 사조에 휩쓸려 들어갔다. (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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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인 1921년 10월, 유학생 원종린은 ‘신인연맹’이란 사상단체를 계획하고 취지서를 만들어 동지를 규합해 나갔다. 이에 박열을 비롯해 조봉암, 김사국, 임택룡, 장귀수 등이 호응해 11월 29일 ‘흑도회’를 창립했다.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던 검정색을 넣어 이름을 지은 흑도회는 친목 성격이 강했던 고학생동우회에서 한 단계 발전한, 조선인에 의해 최초로 조직된 진보적 사회단체라 할 수 있었다.

흑도회 선언문은 그 성격을 잘 말해준다. 절대선, 절대진리, 자기희생의 요구, 사상통일처럼 선을 빙자해 만들어진 모든 억압적 교리를 거부하는 흑도회의 선언은 좌파나 우파나 할 것 없이 전체주의와 행동통일만을 강요하던 당대의 풍조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P45)


탁월한 조직가로 흑도회를 주도했던 인물의 하나인 조봉암은 후자의 경우였다. 그는 흑도회 활동을 통해 무정부주의의 한계를 절감하고 스스로 공산주의를 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한 후 1925년 조선공산당 건설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소련이 스탈린주의로 한계에 봉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는 박열이 말했던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다.

박열의 경우는 전자였다. 도일할 당시만 해도 러시아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고 있던 박열은 도쿄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정부의에 경도된다. 그는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공감했다. 공산당 지도부라는 소수 권력자가 국가를 지배하며 민중에게 그 사상을 강요하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반발했다. 소련식 사회주의란 ‘다수결 제도에 의해 소수 의견을 유린하고 민중의 의사를 강제하는 국가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P48-49)


인간을 옭죄고 지배하는 어떤 주의도 불신하게 된 박열은 자신의 생각을 허무주의라 표현하지 않고 허무사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왜 무정부주의까지 회의하고 허무사상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당시 절대로 권력이 행사되지 않을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정부주의에도 의구심을 가졌다. 인간성은 모두 추악해서 인간성에 신뢰하고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이 추악한 인간성 때문에 무정부주의라는 이상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나는 허무사상을 품게 되었다.”

나아가 자신의 허무사상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설명한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서로를 증오하는 감정도 직시한다.

“우선 인간성이란 것이 얼마나 불순한가부터 말하겠다. 일본에 있어서 각종 사회적 운동자에 관해서 보니 동지를 배반하고, 변절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운동자는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 생활을 공격하는 이면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적이지만, 자기의 주장을 자기의 생활에서 실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니 인간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일면, 증오의 감정이 있으므로 나는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선은 그처럼 많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박열을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에도 깔려 있는 봉건적 위계질서와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비판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천명하고 있는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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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유라쿠초 스키야바시 근처에 있는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은 사회주의자가 운영하고 있어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주 회합을 갖는 식당이었다. 이 식당에는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의 20살 여급이 일하고 있었는데 갸름하니 매력적인 얼굴에 명랑하고 부지런한 여성이었다. 오뎅집 주인은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한다.

“좋은 여성이었다. 애교가 넘쳐 가게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명랑했기 때문에 가네코가 있으면 가게가 밝아졌다.”

가네코는 한가한 오전시간에는 박열도 다녔던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녔는데 일이 끝나고도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식당에서 일하기 전에 그녀를 식모로 고용했던 집주인도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참으로 명랑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밤 1시까지 공부하는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 (P56-57)


가네코가 박열을 처음 만난 것은 흑도회가 창립되고 석 달 후인 1922년 2월이었다. 도쿄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어느 날 오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가던 길에 흑도회 회원 정우영의 하숙방에 들른 가네코는 우연히 잡지 ‘조선청년’의 교정지를 보게 되었다. 그중 ‘개새끼’라는 독특한 제목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허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박열이 쓴 시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순간 격한 끌림에 빠져들었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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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변호했던 우에무라 변호사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가네코는 비상하게 월등한 두뇌를 가진 여자로, 학교 교육은 별로 많이 받지 못한 듯하나 상당한 지식이 있으며, 주의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두려운 것이 없다는 열성적인 사람으로, 박열과 부부가 된 이유도 오직 사랑에만 있지 않고 주의의 공명일치라고 누누이 말한 바 있다. 최후의 사형 판결이 내렸을 때 두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친 것도 박열보다 가네코가 먼저 한 것으로 과연 여장부였다.” (P68)


1922년 7월, 니가타 현의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감옥방에서 집단 탈출을 하다가 감시대의 사격과 구타로 100여 명이 살상당한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 노동자가 노동지옥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알려졌다.

흑도회는 즉시 ‘니가타 현 조선인 학살사건 조사회’를 구성하고 일본의 진보단체들과 결합해 사건 규명과 아직 억류되어 있던 잔류자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박열, 김약수, 라경석, 백무 등 조사위원들은 니가타 현으로 달려가 진상조사를 하는 한편, 도쿄와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자본의 야만적 학살 행위를 폭로하고 근본적인 원인인 조선인 차별대우에 항의하고 나섰다.

9월 7일에는 도쿄의 YMCA 강당에서 조일합동규탄대회를 열었다. 박열도 연사로 참가한 이 연설회는 학살 사건을 규탄하는 동시에 장기적 투쟁을 위한 조직체계를 만드는 데 의의를 두었다. (P71)


1922년 7월 10일자로 창간된 기관지 ‘흑도’는 이러한 활동에 대한 보고와 함께 논단, 시론, 수필과 시 등으로 이뤄졌는데 주요 필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강하였다. 박열은 열생(烈生) 또는 BB생이라는 필명으로, 가네코 후미코는 활랑생(活浪生)으로 글을 발표했다. 주요 필자이던 이강하의 글 ‘우리의 절규’는 당시 흑도회가 지형하던 무산계급의 해방투쟁을 잘 보여준다.

“우리 무산계급은 세계 도처에서 절규를 하고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평등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절규하고 있다. 우리 무산계급은 저 부르주아의 억압과 수탈 때문에 역사를 참담한 피로 물들였다. 지금도 역시 그 상태다. ...... 우리는 세벽부터 밤중까지 하루 종일 일해도 한 조각의 빵조차, 한 조각의 천조차, 또 한 칸의 집조차 쉽게 구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굶주리고 동사하는 지경에 달하여 들개처럼 비참하게 죽어간다. 아, 이 얼마나 부자연, 불합리한 인류사회인가.”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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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또한 4월에는 ‘불령사’를 조직했다. 조선인 항일투사들을 가리키는 불령선인(不逞鮮人)에서 불령을 따온 이름이었다. 흑우회는 계속 유지하면서 이와 별도로 만들어진 불령사는 가네코 휴미코, 육홍균, 최규종, 홍진유 등 조선인 11명과 일본인 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여성이 여럿이었다. 불령사라는 이름은 본래 잡지 제목으로 만들었는데 불순하다고 발행 허가가 두 번이나 반려되자 아예 치안유지법을 무시하고 반공개 단체로 만든 것이다.

불령사 결성식은 도쿄 도요타마에 얻은 2층짜리 셋집에서 비밀리에 가졌다. 경찰의 방해를 피하려 했을 뿐, 비밀 지하조직은 아니었다. 박열은 이 자리에서 불령사는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라고 선언했다.

“사회운동은 누가 뭐래도 대중적으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곳곳에 지사를 두어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가네코 후미코도 말했다.

“흑우회 회원은 비교적 세련된 아나키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나키즘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규합해 이 주의를 선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나중에 법정 진술에서도 불령사를 결성한 이유는 불령한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했으며 동지 중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P75-76)


박열은 29일간의 감방살이 내내 기세등등해 간수들과 대판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일본인 진보운동가들이 앞장서서 구명운동을 펼친 덕분에 금방 석방되었으나 감옥살이가 퍽 힘들었던 듯하다. 그는 얼마 후 조선에서 온 무정부주의자 김중한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감옥에서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그런 곳에서 반년이나 1년을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회운동을 하는 이상 감옥과는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차라리 폭탄을 던져 세상을 뒤집어버리고 죽어버릴 생각인데, 자네는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옥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의지였다. 김중한은 그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고 함께 폭탄 테러를 준비하기로 한다. 그날이 1923년 5월 20일이었다. 마침 그해 9월 일본 왕실의 히로히토(裕仁, 훗날 일왕 쇼와) 왕세자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자는 계획으로 진전되었다. 한 달의 옥살이도 참기 힘들었던 그가 22년이나 갇혀 살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P81-82)


오로지 폭탄 구입만 고민하던 박열이 새로운 인물을 만난 것은 1922년 9월이었다. 시나노가와(信濃川)의 조선인 학살사건을 보고 하기 위해 서울에 보고하러 갔을 때 만난 김한이었다. 김한은 박열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38살로 일본에서 변호사 자격까지 단 당대의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상하이임시정부 사법부장을 하다가 국내에 돌아와 조선청년연합회를 창립하고 ‘무산자동맹회의’의 지도자로서 경성양화 직공 파업을 지원하는 등 노동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 의열단은 계속해서 조선 국내에서 무력 시위를 기도하고 있었다. 김원봉 단장을 중심으로 세 차례 대규모 무기 반입을 시도하는 동시에 개별적인 공격도 진행하고 있었다. 구입한 무기의 조악함, 일경의 치밀한 감시와 자금 부족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70여 명 의열단 단원들의 생명을 내던진 헌신은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인 김한과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열단은 조직과 성향이 달랐으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뭉쳐 있었다. 김한은 공개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는 한편 비밀리에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과 손잡고 국내에서의 대규모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는 박열 또한 이 거사에 동참하게 된다.

무산자동맹회 사무실 등지에서 김한과 수차례 회합하며 서로의 뜻이 맞음을 확인한 박열은 도쿄에서의 폭탄 테러를 책임지기로 했다. 가네코 후미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하기로 했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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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자신의 법정 진술이나 재판 기록들은 박열이 1923년 9월 3일 도쿄에서 체포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사흘째 되던 날,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이 대거 체포되기 시작하면서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기획하고 김인덕이 쓴 “박열”(2013)에는 그가 지진 상황이 궁금해 9월 2일 오후 5시에 집을 나서서 요쓰야(四谷)에 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사무실에 갔다가 잡지 광고를 청탁한 후 지인들을 만나 잡지 발행 지원금으로 20원을 모금한 수 귀가하다가 집 앞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온다. 가네코 후미코는 다음 날인 9월 3일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P97)


일본 정부가 박열 재판의 취재를 봉쇄한 것은 일왕에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박열과 가네코의 발언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요 사건에 대한 법정 출입에 제한을 가하는 일이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박열 사건만큼 철저히 봉쇄하는 일은 드물었다. 박열과 가네코의 법정 발언이 그 어떤 정치사범보다도 강경했기 때문이었다. 장쾌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그들의 대담한 발언들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에 따라 법원 속기록에 생생히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박열,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의 역사적 존재 가치는 이 법정진술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본 왕실에 폭탄을 던졌다거나 무장토쟁에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존엄이 무참히 유린되던 제국주의 침략시대의 지배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질타하던, 민족의 적이자 인류의 적이던 일본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호통 치던 그들의 패기는 인간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두 사람의 존재는 단지 항일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억압과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인본주의자이기에 더없이 빛난다. (P108-109)


“일본 천황, 황태자는 하나의 우상에 지나지 않는 불쌍한 제분기이며 가련한 희생자이다. 행렬 때에 민중이 멀리한다는 의미에서 격리된 전염병 환자 또는 페스트 보균자이며, 인중이 긴 놈들을 속여서 모은 사창가의 얼굴마담과 같이 민중을 기만하고 착취하여 억압을 가하는 권력자 계급의 간판인 것이다. 정체를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유령이지만, 일본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실권자는 황실이 아니며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군벌 자본가이므로 그들을 보는 일이 현재 사회제도를 전복시키기에 가장 의미가 있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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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왜 일본의 천황, 황태자 전하에 대해 소위 폭살 대상으로 삼았는가?”

판사의 질문에 그는 3가지 이유를 들었다.

“나는 일본의 천황, 황태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일본의 황실, 특히 천황, 황태자를 대상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일본의 황실이 얼마나 일본 국민에게서 고혈을 갈취하는 권력자의 간판 격이고, 또 일본 국민들이 미신처럼 믿고 있고 신성시하는 것, 신격화하는 것의 정체가 사악한 귀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고, 일본 황실의 진상을 밝혀서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본 황실은 모든 것의 실권자이며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 민족에게 혁명적이고 독립적인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는 침체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P124-125)


“민족 인류의 공동평화를 위해서도 피고의 생각을 반성하지는 않겠는가?”

“서로 사랑한다든지 평화라든지 하는 미명하에, 기실은 약육강식의 보기 흉한 투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진술해둔 바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모든 해악이 행하여지므로 만일 사랑이라는 관념을 허가한다면 인류를 이 지상으로부터 대청소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 아니겠는가. 또 삶을 긍정하고 삶이 해악의 원천이 아니라고 가정했다고 해도 천황, 황태자와 같은 기생충을 살려 두는 것은 인류사회 민족의 참된 평화를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반성하라는 그 말은 당신들에게 돌려주겠다. 당신들이야말로 반성하는 것이 어떤가?”

일왕 가족을 기생충이라 부르며 거꾸로 판사의 반성을 요구하는 박열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다테마쓰는 판례대로 사건 관련자 및 증인들의 공술 요지를 읽는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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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부부는 1925년 5월 2일에는 감옥 안에서 기념사진까지 촬영했다. 박열은 다테마쓰에게 자신은 사형을 각오하고 있으니 생전에 사진이나 박아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내고 싶다고 요청했다. 예심조서 10여 장을 찢어버리기도 한 박열의 고집을 고려한 다테마쓰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촬영은 예심재판정 제5호실에서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어 10여 장을 찍었는데 막판에 박열이 돌연 가네코의 어깨에 팔을 올린 자세로 찍기를 원했다. 연인이든 부부든 기념사진이라면 여자는 의자에 앉고 한 사람은 그 옆에 똑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통이던 시절이었다. 다테마쓰는 그래도 이를 허가해 다분히 파격적인 한 장의 사진이 남게 되었다. 박열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여유 있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가운데 가네코가 그의 가슴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열의 왼쪽 팔은 가네코의 어깨를 안고 있었는데 손바닥이 그녀의 젖가슴 위에 올려 있었다. 박열의 머리칼은 장발이었고 두 사람의 복장도 죄수복이 아니라 소매가 치렁치렁하니 긴 일본 옷이었다.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다테마쓰는 이 사진들을 그의 집에 보내지 않고 서기의 서랍에 보관시켰다. 이에 박열은 신문 도중 사진 한 장을 빼돌려 ‘서하의 차 중에서’를 쓴 일본인을 통해 내보냈으나 그가 분실하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다.

박열은 감옥에서도 명주 두루마기와 흰 바지 저고리에 조끼까지 받쳐 입은 한복 차림으로 지냈다. 가족, 기자 등 면회객들이 찾아오면 철창을 사이에 두고 잠깐 대화하고 끝나는 일반 면회가 아니라 특별 면회를 시켜주었는데 그 장소도 전옥이라 불리던 형무소장의 응접실을 내주었다. 안내도 일반 간수가 아닌 간수장이 맡았다. 박열은 소장의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면회객들 앞에 단정하게 깎은 머리에 한쪽 가르마로 곱게 빗질을 하고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곤 했다. (P182-184)


사형이 선고된 순간, 가네코 후미코가 먼저 소리쳐 외쳤다.

“만세!”

박열은 웃음을 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려거든 죽여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

뒤따라 가네코도 재판장을 향해 말했다.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 박열과 함께하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히 여긴다! 박열과 나를 같은 교수대에서 같이 죽도록 판결을 내리고 우리들의 죽은 백골이라도 같이 묻어주기 바란다.”

가네코는 또한 박열을 향해 말했다.

“혹시 판결이 어긋나서 당신만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반드시 같이 죽을 것이요. 당신 홀로 죽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P201)


박열 부부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1926년 3월 25일이었다. 재판 결과를 보고받은 에기 다스쿠 법무장관은 당일로 임시각료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숙의한다. 그리고 오후 5시 30분 아카사카궁에 찾아가 ‘섭정궁’이라 불리던 왕세자 히로히토를 접견해 각료회의 내용을 보고했다.

병든 다이쇼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있던 히로히토는 박열 부부를 사형 대신 무기징역에 처하라고 지시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그 과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신문은 법무장관을 ‘법상’이라 호칭하고 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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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떨어진 형무소에 수용된 두 사람은 각기 노역을 하고 있었다. 지바 형무소의 박열은 원래 여죄수 감방이던 방에 홀로 수감되어 노끈 잇는 일과 일본 나막신 코 꿰는 작업을 했다. 우쓰노미야 형무소 도치키 지소의 독방에 수감된 가네코 후미코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형무소 측의 발표에 의하면, 사고가 난 것은 1926년 7월 23일 이른 아침이었다. 가네코는 여자 간수 한 사람의 전속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이날 아침에는 여간수의 감시 아래 철창 아래 앉아 삼노끈을 잇고 있었다. 삼노끈을 잇는 작업은 원래 가네코가 해온 일이 아니었다. 하루 전인 22일 자진해서 그 일을 하겠다고 요청해 처음으로 일거리를 들여보내준 것이었다.

담당 여간수가 잠시 자리를 뜬 것은 오전 6시 30분쯤이었다. 불과 10분 후인 6시 40분, 여간수가 돌아왔을 때 가네코는 철창에 삼노끈을 걸고 목을 맨 채 매달려 있었다. 놀란 간수는 목 맨 줄을 풀고 인공호흡을 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긴급 연락을 받은 의사 사이토와 촉탁의사 구리구치가 20분 만에 현장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눈이 우묵하게 들어가고 초점이 없었다. 검안을 마친 의사들은 말했다.

“신체는 매우 건장하여 하등의 이상이 없고 삼노끈이 급소를 꼭 조여 매어져 숨이 막혀 죽은 것으로, 그 교묘한 자살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가네코의 사체는 7월 24일 도치키 지소에서 사법성 당국자와 우쓰노미야 형무소장의 도착을 기다려 밤중에 끌어내어 마을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일본 정부는 지바 형무소에 있는 박열이 이 소식을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일체 비밀로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P208-209)


신문 보도는 모두 자살로 표현되고 있었으나 자살이라는 형무소 측의 발표를 믿는 정치세력은 없었다. 우파들은 민정당 정부의 온건한 자유주의 정책을 트집 잡아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고, 좌파들은 살해 의혹을 내세우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박열과 더불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거침없이 성토하여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던 가네코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조선인들의 심정은 놀라움에서 의문으로, 이어서 분노로 바뀌었다. 일본의 우익들까지 나서서 제기하는 의혹들은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가네코가 타살되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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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옥살이였다. 1923년 9월 이치가야 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던 박열은 장기 흉악범들만 수용하는 훗카이도 아미하시 형무소와 고스케 형무소를 옮겨 다니다가 1945년 10월, 아키타 형무소 오다테 지소에서 석방된다. 그 기간이 모두 합쳐 8,000일이 넘었다. 햇수로는 22년 2개월이었다. (P223)


일본 정부를 접수하고 군정에 들어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는 모든 정치 사상범을 즉각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조선과 일본의 형무소들은 곧바로 철문을 열어 조선인 항일지사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박열의 감방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대역죄라는 이유였다.

박열에 대한 석방은 재일 조선인들이 10월 15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을 결성하면서 박열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채택하고 가두시위까지 벌인 후에야 결정되었다.

박열이 석방된 것은 1945년 10월 27일 오후 2시였다. 구속 당시 만 22살 앳된 청년이던 그는 만 44살의 원숙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의 석방을 이끌어낸 재일본조선인연맹의 아키타 현 준비위원회 섭외부장 정원진 등은 철문을 나선 박열을 오다테 역으로 인도했다. 역 광장에는 무려 1만 5,000명에 이르는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P231-232)


국내와 일본을 막론하고 지난 수개월 간의 해방 공간에서 열세였던 우파들을 살려준 것이 이 신탁통치 사건이었다.

신탁통치란 미중영소 4개국이 한반도를 5년간 공동 관리하면서 한국인의 정부를 세우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으로, 애초에 미국에서 제안한 방안이었다. 일단 38선을 없애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 지지도에서 앞서가던 좌파들로서는 유리한 제안이었다. 신탁통치 자체도 남북이 통일된 임시정부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신탁통치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좌파의 본산인 조선공산당이 임시정부 수립에 찬성하고 나서자, 우파들은 또 다시 강대국의 지배에 들어가자는 거냐며 맹렬히 매도하기 시작했다. 일반 민중들의 정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공산당이 내세운 것은 신탁통치 찬성이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이었으나 공산당원들조차도 신탁통치 찬성으로 해석하는 형편이라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국내는 물론 일본의 우파들을 기사회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던 조선공산당이 정책을 바꾼 것은 1946년 1월 초였는데 건동이 출범한 것은 1월 20일로, 박열이 운이 좋았던 셈이다. 건동은 7개항의 행동강령에도 신탁통치 반대를 명시했다. (P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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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대를 확인한 이승만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다시 박열과 회담했다. 1947년 4월 8일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승만은 북측이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 동시선거를 거부하고 유엔에서 보낸 선거감시인단의 38선 통과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남쪽만의 국회의원 총선과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박열은 이승만의 주장에 재차 동의하고 ‘민단신문’ 1947년 6월 30일자에 ‘건국운동에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제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공산주의를 배제하고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한 현실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이 두 번의 회담에 대해, ‘박열이 이승만에게 속아서 단독정부수립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권력욕의 화신인 이승만이 자기가 유리한 지역에서 하루빨리 대통령이 되고자 박열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의가 아닌 일에 나설 박열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분단되었던 독일과 베트남도 즉시 통일을 이루지 못했듯이, 분단이 고착화된 것은 어느 몇 사람의 이해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세계적 대립의 반영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제각기 남과 북을 자기 체제의 전진기지로 설정하고 단독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승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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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국회 연설에서 말했다.

"만약 우리의 역사의 되풀이라고 할까, 당파싸움이나 남, 북인 운운의 망국병이 재발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제반사 그 출발에 있는 것이요, 그 토대에 있는 것이니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원, 그 사명은 거룩하기도 하려니와 중대함을 망각치 말으시사, 이 겨레와 세계 인류를 위하여 진선미의 이치에 순응할 어긋난 진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주시기를 바라오며 한동안 멀어진 3영수의 협조를 위하여서는 목적 달성을 기하는 날까지 부단한 노력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해방 조국의 땅에 선 그에게는 일본의 법정을 서늘하게 했던 적개심 가득한 냉소와 저주의 단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P253-254)


박열이 새 나라의 주역이 되어야 할 청년들에게 어떠한 정신을 가르치려 했는가는 그의 유일한 저서인 “신조선혁명론”에 압축되어 있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10일자로 출간된 이 책은 47살 원숙한 혁명가의 깊은 사유를 잘 보여준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24살 나이로 일본의 감방에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대한 저주로 악에 받쳐 쓴 글들과는 사뭇 달랐다. (P260)


“신조선혁명론”의 서두격인 첫째 절은 ‘세계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박열은 현실의 세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나뉘어 있다는 것, 정신적으로는 유물사관과 유심사상이 대립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쪽을 파괴하고 절대적인 승리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로 합쳐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먼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적으로 보아서 세계는 어쨌든 2개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민주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그것이다. 전자는 미국에 의해서 대표되고 후자는 소련에 의해서 대표되어, 이번 세계대전에 있어서도 양국의 완전한 제휴가 파쇼국가들을 일소하는 데 강력히 작용했다. 이 협력이 양국으로 하여금 한편은 민주주의 국가, 다른 한편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명확히 2대 진영을 사상적으로 또한 세력권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P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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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개 중의 어느 것이라도 좋다는 식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여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건국의 사상은 이 2가지를 넘어선 제3의 질서, 즉 조선 민족의 역사와 민족 본연의 전통, 습관, 민족성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 민족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일이다. 물론 건국의 도정은 험준하므로 그 과정에 있어서 미소 양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 희망도, 요구도, 청원도 있을 것이고 어느 때에는 항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 민족의 민족적인 본성을 올바르게 살려나가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조선 민족은 독립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독립으로써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P263-264)


이런 대전제 아래 박열은 “신조선혁명론”의 제4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의 한계와 공산주의의 한계를 분석한다. 특이하게도, 다분히 사회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도 제목은 다분히 감상적으로, ‘죽어야 산다’라고 붙였다.

“나는 노인들처럼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 얘기하고자 한다. 인간은 살려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뜻밖의 병마에 시달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반대로 죽고 싶다고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는 죽지 않는다. 죽게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의 고통에 직면하면 죽을 각오를 한다. 각오가 서면, 죽거나 살거나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투철하면 그것을 초월하는 일이다. 옥중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P270-271)


박열은 반공주의자로서 이승만과 정치행로를 함께했음에도 영구 귀국 후 불과 1년 만에 납북된 뒤에는 김일성과 협조해 공산주의 정권의 고위직으로 살아가는 모순된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신조선혁명론”은 북에서의 그의 행동이 강요된 것만은 아니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박열은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 같은 특정 사상 조류에 가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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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조총련계 간부들이 박열을 방문하면서 북은 그를 수용소에서 끌어내어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6월 20일 평양 중앙방송위원회 소회의실에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발기인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박열은 25인의 준비위원 중 1인으로 참석했다.

결성식은 7월 2일 오후 2시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납북인사와 월북인사 400여 명과 평양의 주요 기관장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안재홍이 개회사를 하고 조소앙이 임무 보고를 한 다음 치러진 선거에서 최고위원으로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의 3인이 선출되고 윤기섭, 최동오, 엄항섭, 김약수, 원세훈, 노일환, 박열 등 11명을 상무위원으로 선출했다. 박열은 29명으로 이뤄진 집행위원에도 선출되어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이 되었다. (P288-289)


흔히 북에서의 행적으로 인해 남쪽에서 박열은 잊혔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일합병 이후 항일투쟁으로 숨져간, 최소 2만 명에 이르는 애국지사 중 박열은 남북 모두에서 대접을 받은 드문 경우였다. 많이 늦기는 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박열 사망 후 15년이 지난 1989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제85호를 추서했다. 1991년 11월 21일에는 박열 등 15인의 납북인사 추모제를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거행하고 1993년 6월 1일에는 박열을 국가유공자 12-181호로 지정했다. 기념사업도 이어졌다. 2001년 10월 30일에는 사단법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6월 28일에는 박열의 생가가 경북지방문화재 14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9일에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박열의사기념관이 세워져 성대한 개관식을 치렀다. (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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