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206. 고든 파크스와 정체성

by 노용헌

카메라를 차별에 대한 저항의 도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던 한 사진가이자 영화감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든 파크스(Gordon Parks, 1912~2006)이다. 지난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사건이 있었다. 백인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흑인 남성 사망사건이다. 백인경찰이 무릎으로 흑인 남성의 목을 강하게 짓누르는 이 사건은 SNS를 통해 확산되었다.(https://www.yna.co.kr/view/AKR20200529116600797?section=news) 인종차별에 대한 혐오는 고든 파크스의 1942년 사진(‘검둥이가 흑인이 되기까지(Negero to Black)’는 미국 성조기와 흑인 노동자의 바닥 같은 삶이 대조되는 장면)과 별 진전이 없어 보인다. 혐오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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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파크스는 20대 시절 우연히 잡지 속 흑인들이 등장하는 사진을 접하면서 그의 사진 인생이 시작되었고, F.S.A의 사진가이었고, 라이프(Life)잡지의 사진가였다. 또한 그는 자전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1969년 영화 <The Learning Tree>에 이어서 1971년 <Shaft>를 통해 흑인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영화감독으로 전향하기 전 그는 종종 “사진은 인종차별, 가난 등 잘못된 사회문제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라고 말하곤 했다. 자신이 살던 시카고 전역의 흑인들이 겪는 가난과 고된 노동이 이어지는 삶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기록했다. <A Choice of Weapons>(무기의 선택, 1965), <거울의 목소리, 1990> 등 여러편의 자서전이 있다.


“사진은 차별과 싸울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다”라고 말했던 그의 사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상을 바꾸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20대에 가졌던 고민들, 중년을 거쳐 노년을 향하면서까지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고든 파크스는 1947년 미국 뉴욕 할렘에서 심리학자 케네스 클락이 흑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형 테스트’ 장면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어린이는 흑백의 아기 인형 중 백인 인형을 가리킨다. ‘인형 테스트’에서 대다수 흑인 어린이들은 하얀 인형에 “좋아요”라며 긍정 반응하며 선택했다고 하는데, 예쁜 것이 백인 인형이라는 편견, 그리고 차별과 혐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무엇이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 모를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인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인지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는 시대. 분열된 자아, 조각난 정체성, 고든 파크스는 그 물음을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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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와 마지막으로 만난 이래로 그는 줄곧 생각했다: 눈: 영혼의 창: 얼굴의 아름다움의 중심: 한 개인의 정체성이 집결되는 점: 그러나 동시에 일정향의 소금기가 있는 특수 세제로 끊임없이 닦고 적시어 유지 보수해야만 하는 시각도구. 인간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경이로움인 시선은 규칙적이며 기계적 세척 운동으로 유지된다. 윈도 브러시로 닦아내는 자동차 앞유리처럼. 요새는 십 초 간격으로, 그러니까 눈꺼풀의 리듬과 거의 같은 간격으로 윈도 브러시의 작동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밀란 쿤데라, 정체성>


“만약 당신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누명을 쓰고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면 당신을 알고 있는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두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뜯어먹으려는 부류에 합류하러 갈 것이고 다른 쪽은 점잖게 못 들은 척할 거예요. 물론 당신은 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거예요. 점잖고 조심스러운 이러한 두번째 범주가 당신의 친구예요. 현대적 의미에서의 친구죠. 장- 마르크, 이런 사실을 나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밀란 쿤데라, 정체성>


나는 무엇을 찍을 것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사진은 그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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