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과 다이안 아버스

소설과 영화, 그리고 사진

by 노용헌

1. 주인공: 난쟁이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정신병원의 간호사는 ‘정상인’ 그리고 환자인 정신병자는 ‘비(非)정상인’이라는 설정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 개념이 부조리한 현실속에서 서로 뒤바뀐다. 영화는 정상인의 ‘내적 기형’이 비정상인의 ‘외적기형’보다 훨씬 뒤틀리고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왜소증(矮小症)의 작은 키의 신체기형이 정신기형과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보는 시각은 내적기형과 외적기형을 혼동하곤 한다. 영화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3살 이후로 성장이 멈추었지만, 그의 정신은 성인의 정신상태이다. 주변사람들이 그를 신체적 특징으로 어린이 취급을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혼돈의 상태로 안쓰럽게 본다.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기형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사진가이다. 아버스의 카메라는 정신병자, 성도착자, 선천적으로 기형인 사람들을 촬영하였고, 누군가는 혐오스럽다고 여기고, 누군가는 동정심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해 그들의 세계를 포츄레이트 형식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속 소수자들은 누군가가 동정해야 할 대상도, 사회가 구원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정상인이 두려워하는 외부적 상처를 이들은 이미 갖고 태어났다. 그들은 이미 삶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귀족이다. 보그와 하퍼스 바자와 같은 상업사진가로 생활했던 연예인들과는 전혀 다른 기형인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는 ’상품‘이 아닌 ’사람‘을 찍고자 했던 것이다.


영화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는 세 번째 생일날에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성장을 거부하고 몸은 세 살배기지만 정신만큼은 완전히 깨어있는 어른으로 저항한다. 난장이인 비정상인 오스카가 정상적인 사람들, 어른이라고 성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세계는 더 비정상적일지 모르는 현실을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모든 것이 역사가 되었고, 아직까지 뜨거워지는 일은 있다 하더라도 곧 차가운 쇠로 굳어져 버리는 오늘날, 나는 정신 병원의 개인 환자로서 연단 밑에 숨어 북을 치던 때의 일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 군중 집회를 여섯 차롄가 일곱 차례 망쳐버리고, 세 차례인가 네 차례 행진과 분열식을 내 북으로 흩뜨려놓았다고 해서 나를 저항의 용사로 보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저항이란 말은 널리 유행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저항 정신, 저항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심지어 저항을 내면화할 수 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일컬어 국내 망명이라고 말이다. 전쟁 동안 침실의 등화관제를 소홀히하여 방공 감시원으로부터 벌금형에 처해졌던 것을 내세우며 지금 저항의 용사, 저항의 사나이로 자칭하고 있는 저 완고한 신사분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P187-188, 양철북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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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의 사진은 다이안 아버스이다. 이 사진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중 하나이다. 두 쌍둥이를 찍었는데 너무나 닮은 두 자매의 모습과 표정을 자세히 보면 다르다. 한명은 행복해 보이고, 한명은 우울해 보인다. 닮은 듯 다른 모습, 겉모습은 같지만 이 둘의 내면은 다르다. 동정과 연민의 눈길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의 그들을 촬영하고자 했던 다이안 아버스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기이함은 그들의 삶이 우리와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삶이다. 평범함과 비범함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진가들은 자칫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남들과는 다른 주제, 소재를 찾다보면, 특이한 요소들을 찾곤 한다. 그것이 특별하다는 소재,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대상을 찾는 데 이것은 자칫 위험한 생각이다. 그들을 단지 대상화한다는 것이 문제인 셈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참으로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준,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의 주관적인 기준, 편견과 오해로 남을 판단하고,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은 하지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아니면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내가 위치한 곳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치우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작가는 정면을 바라보고, 정방향의 포츄레이트를 사용할지 모르겠다.

2.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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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울면서도 여전히 가톨릭식으로 정성어린 기도를 하고 있었다. 파인골트 씨는 아직도 갈리치아를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복잡한 계산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쿠르트는 지치긴 했지만 끈질기게 삽질을 하고 있었다. 묘지의 담 위에는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는 러시아 소년 두 명이 걸터앉아 있었다. 하일란트 노인은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스페 묘지의 모래를 마가린 상자로 만든 판자 위에 퍼붓고 있었다. 비텔로라는 단어의 세 자모가 아직 모래에 덮이지 않고 보이고 있었을 때, 오스카가 목에 건 양철을 벗겼다. 그리고 이제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 아니라 「자라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관 위에다 북을 던졌다. 거기에는 이미 모래가 충분히 덮여 있어서 덜커덩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북채도 잇따라서 던졌다. 북채는 모래 속에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것은 먼지떨이 시대 이래로 내가 사용하던 북이었다. 전선 극장의 예비품 중의 하나였으며, 베브라가 내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스승은 나의 이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까? 예수도 그 양철을 두들겼었다. 상자처럼 네모나고 커다란 마마 자국이 있는 러시아 병사도 그것을 두들겼었다. 그 북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긴 했다. 하지만 모래 한 삽이 북 표면에 떨어지자 북은 그래도 소리를 냈다. 두번재 삽에도 약간 소리를 냈다. 세번째에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고, 다만 희게 래커칠한 양철만을 약간 드러내었다. 마침내 그 부분마저도 다른 모래 부분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계속해서 모래가 쏟아졌다. 내 북 위에는 모래가 불어나고 쌓이고 성장했다 ㅡ 그러자 나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심하게 코피가 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P176-177, 양철북Ⅱ>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몸은 어른이지만, 행동이나 생각은 어린이보다 못 하지는 않는가. 내적 성장을 하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경험하고,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다이안 아버스는 그러한 상처를 통과의례한 사람들을 기형인으로 보았다. 성장은 진통을 겪는다.


기형 사진이야말로 내가 가장 많이 찍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대상중의 하나로서 내게는 지독히 흥분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곤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 중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하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들은 수치심과 경외심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속의 인물처럼 기형인들에 대해서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형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이안 아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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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의 오스카는 라스푸틴과 괴테로부터 성장한다. 라스푸틴과 괴테 모두 이성의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갈증, 편집적인 욕망은 오스카의 내적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히틀러와 베토벤의 초상처럼, 라스푸틴과 괴테로부터 시작한다. 오스카는 결핍에서 오는 욕망을 여인들에게 찾았다.

많은 그림들이 들어 있는 두꺼운 책 ‘라스푸틴과 여인들’은 모두 그레트헨의 서가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주저한 후에 –빨리 마음을 정하기에는 너무 선택의 여지가 적었다- 무엇을 잡았는지도 모른채 다만 소위 말하는 내면의 소리에 순종하여 우선 라스푸틴을, 그리고 다음에 괴테를 골랐다. 어쨌든 이 둘을 선택한 것이 나의 인생, 최소한 애써 북을 떨쳐버리려고 했던 나의 인생을 결정짓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P133, 양철북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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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 아버스(1923~1971)는 기형인(Freaks)들을 자신의 소재로서 피사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존경했던 것이다. 현실의 부조화, 금기라고 인지되었던 기형인들의 삶을 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토드 브라우닝(Tod Browing)의 영화 <기형인(Freaks)>에서처럼 기형인들을 보는 대중적인 인식은 그로테스크(grotesque)한 괴물로서의 시선들이 있다. 영화 <프랑케슈타인>이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등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들로서의 기형인이고 이들 중 일부는 서커스라는 무대에서 생활한다. 서커스 집단에서의 난쟁이들의 사진은 메리 엘렌 마크(Mary Ellen Mark)의 사진에서도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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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망과 희망

그렇다면 미래는 절망적인 희망적인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절망적인가 희망적인가. 미래에서 온 검은 마녀. 자라기를 거부하고 양철북에 집착하며 소리를 질러 유리를 박살내는 것이 전쟁 전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성장하고 스스로 예수라 칭하며 언제 어디서나 검은 마녀의 존재에 두려워하는 모습은 전쟁 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마녀에게 쫓기는 신세, 미래는 절망적인 희망적인가. 검은 마녀에 쫓기던 오스카가 선택한 도피처가 바로 정신병원이다.


“예전에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웨딩 케익과 같이 새하얗고 현란한 큐피트 모양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로코코풍의 배에 내가 타고 있었습니다. 실내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끼고, 승객들은 술을 마시면서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화재로 천천히 침몰해 가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쾌활하게 노래하고 춤추고, 키스하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찍고 싶은 것은 그 무엇이라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안 아버스 1971년 4월 1일) 그녀는 1971년 7월 26일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목을 그은 채 욕조 옆에서 발견되었고, 부검 결과 급성 바르비투르산염 (수면제) 중독으로 진단 받았다.

내 등 뒤에 있었던 마녀는 검은빛이었다.

이제 그녀는 나의 앞쪽에서도 다가온다, 검은빛으로.

말씀과 외투를 휘날린다, 검은빛으로.

검은 돈으로 지불한다, 검은빛으로.

아이들이 노래하든 말든 상관없이 다가온다.

검은 마녀는 있느냐? 있다있다있다! <P491, 양철북Ⅱ>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 전등 아래에서 태어나고, 세 살의 나이에 일부러 성장을 멈추고, 북을 얻고, 노래로 유리를 부수고, 바닐라 냄새를 맡고, 교회 안에서 기침을 하고, 루치에게 먹이를 주고, 개미를 관찰하고, 다시 성장을 결심하고, 북을 파묻고, 서방으로 가서 동족을 잃고, 석공 일을 배우고 모델일을 하고, 다시 양철북으로 되돌아가서 콘크리트 요새를 시찰하고, 돈을 벌고, 손가락을 보관하고, 손가락을 선사하고 웃으면서 도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고, 그후에 석방되어, 오늘 30회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검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P488, 양철북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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