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2008년

by 노용헌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빌리 엘리어트〉, 〈디 아워스〉 등으로 알려진 스티븐 달드리 감독, 케이트 윈슬렛, 랄프 파인즈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특히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촬영상 등 5개 부문과 영국아카데미상(BAFTA)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도 출품 선정되었다. 또한 케이트 윈슬렛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로 전미방송비평가협회상, 골든글로브, 시카코비평가협회상, 라스베가스비평가협회상 등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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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 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 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 (P5)


그 후로 다가온 것은 진상의 파악, 즉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은 나중에 가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던가?

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 (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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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의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 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엔진이 고장난 상태에서의 비행은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더 조용하다. 아주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것이 몸체와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와 있다. 아니면 기내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남녀 승무원들은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상태이리라. 승객들은 어쩌면 약간 더 조용해진 비행을 특히 쾌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은 우리 사랑의 활공 비행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P76-77)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털어놓았어야 하는 것들도 일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부인(否認)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심사숙고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피하려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버린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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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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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나를 다시 보았다. 그것은 법정에서였다.

강제수용소와 관련해 역사상 처음 열리는 재판도 아니었고 아주 중요한 재판도 아니었다. 당시 우리 교수님은 나치 과거와 그에 관련한 재판에 대해 연구를 하던 몇 안 되는 교수들 중 하나였다. 교수님은 그 재판을 세미나의 주제로 삼았다.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하고 또 평가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검증하고 증명하려 했던 것, 혹은 반박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그 세미나에서 우리가 소급처벌금지에 대해 논의했던 것은 기억한다. 수용소 감시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령이 그들의 범죄 행위 당시에 이미 형법에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 법령이 그들의 행위 당시에 실제로 어떻게 해석되고 시행되었으며, 또 당시에는 그 조항이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법전에 적혀 있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사회에서 실제로 집행되고 준수되는 것을 말하는가? 법이란 법전에 규정되어 있든 규정되어 있지 않든, 어떤 일이 정당하게 이루어진다면 그에 따라 집행되고 준수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망명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독일 법학계에서는 국외자 신세였던 그 노교수는 그의 모든 학식을 동원해가면서 그리고 동시에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더 이상 학식만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자의 초연한 태도로 그 토론에 임했다.

“피고들의 얼굴을 잘 보세요. 이들 중 당시에 자신이 남을 죽여도 된다고 정말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P97-98)


몇 주 동안 계속된 재판 내내 나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감각은 마비된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나의 감각에 자극을 주면서, 기소된 내용처럼 행동하는 한나의 모습을 될 수 있는 한 뚜렷이 떠올려보았고, 그녀의 목덜미 머리카락과 어깨 배냇점이 나의 기억 속에 불러일으킨 행위를 하는 한나도 떠올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주사를 맞아 마비된 팔을 손으로 꼬집는 것과 같았다. 팔은 손에 의해 꼬집힌 사실을 모르고, 손은 팔을 꼬집은 사실을 안다. 그리고 뇌는 처음에는 두 가지를 따로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뇌는 두 가지를 정확하게 구별한다. 아주 세게 꼬집어서 그 부위가 한동안 창백해질 수도 있다. 조금 있으면 피가 다시 돌아오고, 따라서 그 부위도 다시 원래의 색깔을 되찾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감각을 되돌려놓지는 못한다. (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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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런 태도는 마치 한 달 한 달 죽지 않고 살아남아 강제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가면서 새로 오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무심하게 기록하는 수감자와 같았다. 나는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느낄 법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든 기록은 이러한 마비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자비해지며 가스를 살포하고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범행자들의 간헐적인 언급에서도 가스실과 화덕은 일상적인 주변 환경으로 등장했다. 범행을 저지른 자들의 삶 자체 역시 몇 가지 기능으로 국한되었고, 그들은 마취되거나 술에 취한 듯 무자비와 무관심, 불감증을 보였다. 내가 보기에 피고들은 여전히 이러한 마비 증세에 사로잡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아 보였으며 그러한 상태 속에서 거의 화석화된 것 같았다.

이렇게 널리 번진 마비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마비가 범행을 저지른 자와 희생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즉 나중에 판사나 배심원, 검사나 의사록 작성자의 자격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게 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아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던 당시에, 그리고 범행자와 희생자, 죽은 자와 산 자,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을 서로 비교하던 당시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P111-112)


재판장은 한나에게 신문을 한 변호사에게 질문이 아직 더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한나의 변호사에게 묻겠다고 말했다. ‘그녀한테 물으시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것이 그들이 어차피 집 짓는 일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 그들이 어차피 다음번 수송 때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만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으시오. 한나, 어서 그렇게 말해. 당신이 그 여자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참을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말해. 그것이 당신이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바로 그 이유라고.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그리고 있을 수도 없다고.’

그러나 그 변호사는 한나에게 묻지 않았고, 한나 역시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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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또 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 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P170)


결국 나는 재판장을 찾아갔다. 한나를 찾아가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또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한나와 만나 이야기하지 못했는가? 그녀는 내게서 떠났고, 나를 속였고, 내가 평소 알고 있었던 또는 내가 상상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나? 그녀에게 이용만 당한, 책 읽어주는 어린 남자 아이였던가?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한 나이 어린 잠자리 상대였나? 만약에 그녀가 내게서 떠날 수는 없지만 나를 제거하고 싶었다면, 그녀는 나 역시 가스실로 보냈을까?

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지 못했는가? 나는 잘못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나의 평생 거짓말과는 상관없이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나를 위한, 그리고 한나의 뜻에 반대되는 정의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정의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나를 과거의 모습대로 혹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직접적으로 안 된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그녀에게 어떠한 것이든 영향과 작용을 끼치고 싶었다. (P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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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단 한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가 있을 때에도 그곳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냈다. 나는 특별히 기간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어떤 때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일주일이나 보름마다 부쳤으며, 어떤 때에는 3주나 4주 만에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나가 이제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익혔으므로 내가 보내는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것 외의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P177)


그러나 어떠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느끼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당시에 나는 자신들의 부모뿐만 아니라 범행을 저지르고, 또 범행을 수수방관하고, 외면하고, 묵인하고, 수용한 모든 세대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 수치심 자체는 아니라도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한 다른 학생들을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내가 이들 학생들에게서 자주 발견하고 했던 그 의기양양한 독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어떻게 사람이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렇게 독선을 과시할 수 있는가? 부모로부터의 그러한 분리는,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부모가 저지른 죄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단순한 수사요, 잡음이요, 소음에 지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생각들은 나중에 떠오른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나중에도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했다.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운명에서 더욱 빠져나오기 힘들고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슬쩍 넘어가기도 힘든 것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내가 당시에 나의 세대에 대해 공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내게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 (P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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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그때의 느낌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그 느낌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수정하여 먼저 녹음했던 것을 지우고 그 위에 다 새롭게 녹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의 낭독으로 끝내고 싶었다. 한나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있어서 나의 모든 힘과 나의 모든 창의력과 나의 모든 비판적인 상상력을 묶어서 바치는 재판관이 되었다. 그런 후에 나는 나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어떤 사적인 말도 결코 담지 않았고, 한나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으며,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목과 작가 이름과 텍스트만을 읽었다. 텍스트가 끝나면 잠시 기다렸다가 소리가 나게 책을 탁 덮고 스톱 단추를 눌렀다. (P197)


모든 것을 뒤로하고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한나가 죽은 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혹시 내가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한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빚을 진 것은 아닌지, 혹시 그녀를 사랑한 까닭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진작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그 방법은 어때야 했는지 하는 해묵은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가끔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리고 가끔 그녀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에 대해서 화가 났다. 마침내 분노의 물결이 물러가고 그러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내가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 - 그것은 이제는 바로 나의 인생이 되었다. (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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