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 1971년
<두 영국 여인과 대륙>은 앙리 피에르 로셰가 <줄과 짐>에 이어 집필하고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자 완성된 형태로는 마지막 소설로, 그가 죽기 3년 전인 1956년에 발표됐다. <줄과 짐>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우정과 욕망을 그렸다면, <두 영국 여인과 대륙>은 두 여자와 한 남자를 통해 미지의 감정인 격정과 이 격정을 애써 잠재우려는 의식적인 억압의 되풀이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로셰의 작품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깊이 이해했던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해 1971년 영화화됐다.
뮤리엘이 앤이 애초 계획했던 자리를 차지했다. 요컨대 그녀의 창조력과 기운으로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녀를 무조건 따랐다. “이렇게 셋이 함께하기 전부터 당신과 앤을 지켜봤어요. 내가 감히 먼저 끼어들 수는 없었죠.” 우리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앤과 뮤리엘의 허영기 없는 태도와 스포티한 면이 좋았다. 두 사람은 절대 다른 이를 험담하는 법이 없었다. 뮤리엘이 말했다. “그런 상황이 될 때마다 번번이 본연의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되죠.” 그녀는 성경을, 앤은 폴 베를렌의 시를, 나는 산초 판자의 대사를 읊었다. (P28-29)
세상의 모든 여자에겐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남자, 즉 정해진 배필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 여자가 더불어 평화롭고 보람되고 심지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남자는 여럿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완벽한 남편이 될 수 있는 남자는 오직 하나뿐이죠.
그 남자는 죽었을 수도 있고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 여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나아요.
모든 남자에겐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단 한 사람의 여자, 정해진 배필이 있어요.
앤과 나,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생각해왔죠.
난 아마 결혼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혼자서 더 잘 완수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신께서 내 남자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그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P73-74)
앤, 앤, 끔찍하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도와주렴.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어. 언젠가 내가 클로드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늘 있었어. 그런 날을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보기도 했지. 하지만 클로드가 날 사랑하는 것,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P102)
뮤리엘과 함께 명성 높은 수도원을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앞서 달리는 뮤리엘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나는 그녀의 거절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만으로도 신천지였으나, 오늘 아침은 더 이상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수도원은 아름다웠고, 뮤리엘은 대천사 인도자였다. 기둥들 사이의 유리창을 통해 스며든 햇빛을 받은 뮤리엘은 더 한층 아름다웠다. 견딜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나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았는데, 이제는 그녀가 나를 가시 달린 장미꽃 줄기로 후려치고 있었다. 더는 그녀 없이 살 수 없었다. 나는 뮤리엘에게 처음으로 육성으로 물었다. “뮤리엘, 언젠가 당신과 내가 ‘우리’일 수 있을까요?” (P142-143)
난 끝도 없이 미끄럼틀을 타고 있어요. ‘넌 그를 사랑해, 아니, 사랑하지 않아, 넌 끝내 그를 사랑하게 될거야,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그와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서 가족을 떠날 수 있을까? 과연 그가 정말 내 남자일까?’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내 방으로 올라가 신과 대면한답니다. 그 힘이 나를 무릎 꿇리고 이렇게 말하게 만들죠. “하느님, 제가 이번 생에서 영원히 클로드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곤 다시 미끄럼틀이 시작되죠. ‘난 클로드의 수업만 하고 싶어, 그가 날 조용히 내버려두었으면.....! 힘든 공부를 겨우 마치고 귀가하면 가족 모두 나를 필요로 하는 현실인데, 그런데 쿵! 그가 나를 사랑한대. 그래, 그러라지, 그런데 쿵! 다들 나도 그를 사랑하길 바라는 거야. 정작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가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했고 그 과정에서 난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됐어! 그가 없었을 때의 내 삶만으로도 이미 기진맥진인데, 그가 거기에 더 보태다니 용량 초과야! 그래서 화가 나.’
내가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줘요......
때로 당신을 향해 이렇게 외칠 때가 있어요. “가버려요!”
그랬다가도 이따금 이런 말을 덧붙이죠. “돌아와요!” (P160-161)
클레르 여사가 말했어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속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편이 더 깨끗하거든, 시간도 벌 수 있고.”
내가 대답했죠, “알겠어요, 엄마, 속는 사람이 될게요.” (P175)
당신은 내가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그런데 이제 난 모든 것을 혼자 알아나가야 해요. 하지만 내게 사랑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이 날 사랑하는 걸 알아요. 그런 걸 안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두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있어요. 나한텐 아직 단어에 불과할 뿐인데(기분은 좋지만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사랑이 우리의 겨울을 초토화시켰어요. (P197)
자매가 내게 말했다. “봉주르, 프랑스!”
나는 이 이름이 좋았고,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나를 그렇게 불렀다.
뮤리엘이 앤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클로드는 프랑스만 되는 게 아니야, 우리한테 돈키호테와 단테의 시를 읽어주었고, 그리스도 생생하게 알려줬잖아. 그뿐이야? 쇼펜하우어니 크누트 함순이니 입센이니 톨스토이에도 눈뜨게 해주었어. 클로드는 차라리 우리 영국인들에게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야, 클로드를 대륙이라고 부르자.”
다음날, 자매가 내게 말했다. “봉주르, 대륙!” (P209)
스위스에 있을 때 어느 날, 뮤리엘이 결혼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 이거 먹어요. 그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꿀 수 있대요.” 다음 날 아침, 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꿈을 꿨어요. 하지만 무효예요. 우리가 케이크를 바꿔 먹었으니까.” ……사실이었다. 그것은 뮤리엘이 유일하게 애교를 부린 순간이었다. (P214~215)
클로드, 오직 널 보기 위해 널 만나고 싶어. 그러고 나서 더 보고 싶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오직 내 이성만이 너의 결정을 받아들였어. 너의 여자 친구들 문제는.....
예전처럼 너의 사상을 배우고 따르고 싶어, 비록 그것들이 충격적일지라도,
넌 내게 말했어. “사랑해.”
내가 대답했지. “기다려.”
네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어. “날 가져.”
네가 말했지. “가버려.” (P264)
내 사랑은 클로드의 사랑만큼 강렬했던 적이 없지만, 일단 한번 불이 붙자 꺼질 줄을 모른다. 그의 사랑이 기쁨의 폭죽이었다면, 내 사랑은 나도 모르게 불이 지펴진 아궁이라고 할까. 그의 사랑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내 사랑은 영원하기만 한데. (P270)
당신의 편지! 그러니까 웨일스에서 밤중에 강을 건너며 내가 툴툴거렸을 때, 나한테 키스하고 싶었단 말이지? 다른 날도 기억나? 함께 술래잡기를 하던 날. 내가 정신이 얼얼하도록 나뭇가지에 세게 부딪쳤는데,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내 손목을 붙잡았던 거. 당신은 목이 메더니 얼굴도 다른 사람이 되었지. 난 당신의 손을 뿌리쳤어. 그때를 떠올리자니 한없이 즐겁기만 해…… (P301)
어느 날 앤이 말했다.
“혹시 뮤리엘 언니를 나보다 더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
“글세, 상상할 수 없는 걸. 그건 다른 세상이니까. 뮤리엘은 내겐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
“내 생각엔 그랬을 것 같아. 난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언니와 짝을 지어버렸거든.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고 할까. 거기엔 이유가 있어. 언니는 모든 운동에서 나를 이겼어. 그러니까 의지만 있었더라면 언니가 이 분야에서도 날 이겼겠지. 난 당신과 언니를 결혼시키는 데 거의 성공했어. 더러 강기슭에 갔던 날 밤처럼 질투심이 들 때도 있었어. ‘내겐 무엇이 남을까?’라는 회의가 들었지만 이내 당신과 언니의 사랑을 위해 마음을 다잡곤 했지. 이별에 관한 당신의 일기를 읽기 전까지 말이야. 당신의 일기는 내게 성경이 되었어.
당신과 언니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지. 그때 비로소 난 사심을 갖고 당신을 쳐다보기 시작했고, 당신이 그걸 눈치채게 된 거야.” (P323-324)
바람에 머리가 잘려 버팀목을 잃은 홉(hop)의 줄기를 본 적이 있어? 덩굴은 금방이라도 힘차게 위로 뻗을 기세지만 그럴 수 없는 운명이지, 덩굴과 버팀목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공간이 생겨버렸거든. 덩굴은 계속해서 자라나지만 아무것도 붙들지 못한 채 맥없이 휘면서 허공에 나선을 그리다가 땅바닥에 쌓여버려. 생각을 바꾸지 않은 채 그렇게 죽어가는 거지. 버팀목이 홉을 붙들어주기만 하면 그 주위로 다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넌 나의 버팀목이야. (P342)
작년에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이 여전히 날 사랑한다는 걸 느꼈을 때만 해도 나는 당신과 앤 사이의 사랑을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 사랑을 조금 내비치기도 했을 거예요. 앤은 내 행복을 바랐고, 내게 장애물이 되고 싶지 않았겠죠. 이제는 앤도 알고, 상황은 최악이 되었죠. 하지만 이런 영역에서는 본능이 중요하죠. 그 본능이 앤을 당신에게로 밀어붙일 거예요. 물론 앤은 내게 자기는 상관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큰소리치겠지만요. 앤은 자기의 감정이 즉흥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고, 따라서 우리는 불가능해요.
생각해봐요, 클로드. 앤이 지난 몇 해처럼 가끔씩 당신과 함께 지내고, 나도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니까 두 사람의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당신을 나눠 갖는다 쳐요. 당신은 우리를 번갈아가며 차례로 받아들일 건가요? 다른 사람이 불행할 때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을 우리는요? 비록 우리가 머리로는 무고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막상 실행해보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거예요.
당신을 더는 다시 못 보겠다는 말은 못 하겠어요. 다만 우리는 더는 키스할 수 없어요.
내 기도에서 당신과 앤은 늘 한 묶음일 거예요. ‘클로드와 앤’ 아니면 ‘앤과 클로드’로, 그대들은 내 가슴속에서 하나예요.
여기서 멈춰요.
앤은 우리를 이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고 있어요. 난 그 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과 멀어지지 않은 채, 당신보다 더 그 애 가까이에, 그리고 내킬 때 그대들을 바라볼 거예요. (P360-361)
우리는 인생에서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나무줄기와 같다. 나무줄기 뭉치에 달라붙는가 하면 더러 얼마간은 떨어져나가 소외되기도 한다. 우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줄기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나무줄기와 우리 사이에 끌림이 형성될 수도 있으며,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나무줄기 뭉치는 그렇게 계속해서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그런데 어디로? (P369-370)
첫 두 해는 누이로서 사랑했어요. 당신은 그보다 넘치는 사랑을 주었지만 내가 거절했죠. 이어지는 다섯 해 동안엔 내가 빠져들었고요. 당신은 인식하지 못한 채 구명줄로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당신에게 끌려갔어요. 그런데 거기엔 앤이 있었죠, 가슴속에 불을 품고서. 당신도 있었어요, 가슴속에 불을 품고서. 결국 그 불에 구명줄이 활활 타버렸죠.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