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니쉬 걸> 2016년
제72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초연 되었으며, 토론토 국제 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되었다. 이 영화는 배급사 포커스 필름을 통해 2015년 11월 27일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유니버설 픽처스 배급으로 2016년 1월 1일 영국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포함한 4개 부문에 후보 지명되었다. 게르다 베게너를 연기한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미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레타의 손이 캔버스를 향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찍이 떨어졌다. 그레타의 은팔찌와 반지들이 흡사 떼를 지어 헤엄치는 한 무리 고등어처럼 앞으로 뒤로 움직였다. 에이나르는 물고기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레타의 팔을 계속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왕립 극장에서 지휘자의 지휘봉을 향해 턱을 쭉 빼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안나를 떠올리기도 힘들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피부를 붕대처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실크 드레스의 감촉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그것이 드레스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실크는 가볍고 부드러워서 마치 거즈 같았다. 향유를 흠뻑 먹은 거즈가 상처 입은 피부를 우아하게 덮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에이나르는 아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내는 안나의 얼굴에 배어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느라 정신없었다. 에이나르는 아련한 환상의 꿈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는 누구든 안나의 드레스를 가질 수 있다, 에이나르까지도. (P24)
에이나르는 크기가 작은 풍경화들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그림을 양손으로 잡고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그림은 습지 위로 겨울 석양이 내려앉은 풍경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눈이 쌓인 것을 표현하는 얇고 거무죽죽한 선 하나가 축축한 땅과 하늘을 구분해 주는 유일한 표시였다.
“블루투스의 습지인가요?”
최근 들어 그레타는 에이나르의 풍경화가 점점 지겨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계속 풍경화만 그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나르는 오늘 저녁에 히스를 끝내고 내일 아침엔 다른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P41)
먼저 도착한 한스가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테이블에 앉자 그레타는 자신의 계획 때문에 초조해졌다. 한스가 릴리를 보고 에이나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밀려 왔다. 한스가 테이블 앞으로 목을 숙이며 “이 작고 귀여운 숙녀가 제 친구 에이나르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레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물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릴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레타는 릴리를 쳐다보았다. 집에 있던 실내복을 입고 나왔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커다란 고무 튜브를 바다에 띄우고 오랜 시간 누워 있던 탓에 가무잡잡하게 탄 모습이었다. 그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여기엔 릴리 말고 아무도 없어, 그레타의 눈에도 릴리만 보였다. 그레타는 웨이터가 의자를 빼줄 동안에도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레타와 릴리에게 차례대로 키스했다. 그 모습에는 에이나르가 설명했던 어린 소년과 어느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자, 이제 에이나르에 대해 말해 주세요.” (P115-116)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자, 그는 어느새 릴리가 되어 있었다. 에이나르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부터 릴리는 그레타를 위해 오전 내내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8월의 태양을 피하기 위해 장갑을 끼고 한스와 함께 방파제를 따라 걸을 것이다. 이제 에이나르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만 등장할 것이었다. 릴리가 “에이나르는 블루투스를 많이 그리워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온 세상이 그 말을 들을 것이었다.
호두가 반으로 갈라지고 귤 껍질이 벌어지듯 에이나르와 릴리는 다시 둘로 갈라졌다. (P128)
그레타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림에 파스텔처럼 밝은 색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특히 노랑과 캔디 핑크, 아이스 블루 같은 색을 더 많이 사용해 보기로 했다. 물론 그레타는 여전히 초상화만 그리고 있었고, 여전히 병 물감을 쓰고 있었다. 잘 닫히지 않아 불안한 병 물감의 마개는 뮌헨의 한 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예전 그림이 진지하고 직설적이며 형식적이었다면, 새로 그리는 그림은 색감이나 분위기가 아주 다채로웠다. 릴리도 새 그림들은 설탕 사탕인 태피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새 그림들은 크기도 훨씬 컸고 대상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물론 최근 그림의 주제는 모두 릴리였다. 양귀비꽃이 만발한 벌판의 레몬 나무 숲 혹은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릴리를 그린 작품들이었다. (P141)
볼크 교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 수술 날짜를 목요일로 정했습니다. 피르나 클리닉에서도 의사들 몇 명이 오겠다고 했고, 그밖에도 수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만약 성공한다면 제가 아주 특별한 업적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누구도 꿈꿔보지 못한 그런 일을요.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의사가 자신의 의사 이력에 위험이 될 줄 알면서 허튼 소문에나 나올 법한 일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볼크 교수는 앞섶을 열어젖혔다. (P230)
에이나르가 파리를 떠나기 전, 지금 어떤 일이 뛰어들려는 건지 알고 있느냐고 칼라일이 물어왔다.
“볼크 교수가 매형에게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요?”
사실 에이나르는 볼크 교수가 자신을 변화시켜 줄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교수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줄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점점 쓸모없는 기관으로 퇴화해 가는 칙칙한 생식기를 제거햐 버리는 것인가?
“그러지 말고 뷔종 박사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칼라일이 다시 말했다. 그러나 에이나르는 이미 그레타의 계획에 동의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이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 깨어 있던 고요한 밤에, 그레타와 에이나르는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나도 함께 가게 해줘요. 당신 혼자 모두 감당할 필요 없잖아요.”
그레타는 그의 손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애원했다.
“나 혼자라야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러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말이야.” (P285-286)
그는 습지에서 태어났다. 남자아이로 태어난 습지의 여자아이. 그러나 에이나르는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에이나르의 제일 첫 기억은 할머니가 입고 있던 여름 드레스의 작은 구멍들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을 본 것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풍성한 레이스 소매가 아기 침대에 축 늘어져 에이나르가 손만 뻗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나르는 그때의 생각들, 아니 그 순간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과 빛과 불처럼 하얀 레이스 구멍 역시 만물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원소 같았다. 에이나르는 그 레이스 구멍이 영원히 자신을 감싸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287)
릴리는 목선이 보트처럼 깊게 파이고 소매가 없는 드레스를 입었고, 굽실거리는 머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설마, 저 그림에서 에이나르가 보인다는 말은 아니겠죠?”
“아니요, 보입니다. 작년 가을쯤에 에이나르가 이야기를 해줬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뷔종 박사의 치료를 받아야 할지, 볼크 교수를 만나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요. 그러던 어느 날 에이나르가 제 화랑으로 왔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사무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에이나르는 계속 울고 있었어요. 그림 속 릴리보다 더 하얗게 질려서 말이죠. 저는 에이나르가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목의 힘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숨도 제대로 못 쉬더군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밖엔 없었지요. 그러자 에이나르가 모든 걸 말해 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모든 걸 알 것 같다고 했습니다.”
“뭘 말인가요?”
“에이나르와 당신에 대해서.”
“저요?”
“그래요. 지금까지 당신이 왜 그렇게 방어적이었는지, 왜 모든 걸 비밀에 부치려 했는지 말이죠. 어떻게 보면, 에이나르가 아니라 꼭 당신의 비밀인 것처럼 숨기지 않습니까.”
“그이는 내 남편이니까요.” (P302)
“혹시 릴리는 혼자 사는 걸 생각해 보진 않았을까요?”
어느 날 한스가 물었다. 그레타는 깜짝 놀랐다.
“네? 저 없이 말이에요?”
그레타는 릴리가 코펜하겐의 생활에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노력을 기울였다. 눈이 녹아 온 도시가 질척거리던 어느 오후, 그레타는 릴리의 손을 잡고 왕립 공원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생울타리 사이를 지나 거리로 나섰다. 릴리는 두터운 울 머플러 속에 입이 잠기도록 목을 움츠린 뒤 잰걸음으로 그레타를 따랐다. 수술은 릴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남겨놓았다. 모르핀 약 기운이 사라질 때면 뜨거운 고통이 불같이 살아나 릴리의 온몸을 덮쳤다. 그레타는 릴리의 손목에서 톡톡 맥박이 뛰는 것을 느낄 때마다 릴리를 안정시켜야 했다. (P366)
“앞으로도 나를 이렇게 사랑해 줄 수 있어요?”
릴리가 물었다.
“오, 릴리, 언제쯤이면 내 마음을 알게 될까요?”
헨리크는 릴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지금 바로 당신과 뉴욕에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전 드레스덴으로 돌아가야 해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릴리는 볼크 교수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수술을 한 번 더 한다면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다고 교수가 약속했었다. 릴리는 헨리크에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헨리크는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혹은 릴리가 마지막 수술을 받지 못하게 강하게 말릴 수도 있다. 헨리크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작년에 드레스덴을 떠나는 릴리를 향해 볼크 교수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릴리를 지금보다 더 여성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네요.”
그레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너무 엄청난 꿈처럼 보였지만 볼크 교수는 특유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약속했다. 릴리가 퇴원 준비를 하는 동안 볼크 교수가 자궁이식 수술의 성공 소식을 알려왔다. 그는 릴리도 자궁 이식 수술을 받고 아이를 가질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럼 제가 엄마가 될 수 있단 말씀인가요?” (P397)
릴리는 눈을 떴다. 칼라일과 안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두 사람은 릴리에게 돌아올 것이며, 휠체어에 앉아 있는 릴리를 찾을 것이다. 강 건너편에서 넓은 풀밭을 내달리던 소년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이들의 연이 하늘 높이, 버드나무보다, 아우구스투스 다리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얀 침대보 같은 마름모꼴 연이 하늘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며 엘베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실패를 풀고 당김에 따라 연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가 연줄이 툭 끊어져버렸다. 연은 자유롭게 하늘을 유영했다. 어린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흐릿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이들이 풀밭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실패를 감던 아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얀 연이 아이들 위에서 바람을 따라 바르르 몸을 떨다가 마치 하얀색 박쥐처럼 위로, 위로 솟구쳤다. 그러더니 하얀 유령처럼 아래로 쑥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하얀 연이 엘베 강을 넘어 릴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P439)
[작가의 말]
이 책은 에이나르 바이에네르와 그의 아내의 실제 이야긱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결혼 생활의 은밀한 공간을 탐험해 보고 싶었다. 나의 짐작과 여러 가지 생각과 또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그 은밀한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에이나르의 성(性)이 바뀌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정이 책에서 묘사되긴 했지만, 자세한 장소나 시간 그리고 그들이 나눈 대화나 실제 모습은 오로지 나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31년 초, 성전환 수술을 받은 한 남자의 기사가 터져 나왔다. 세계 유수의 신문들은 에이나르 바이에네르의 놀라운 삶에 대해 다양한 기사를 발표했다(릴리 엘베 자신이 성전환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녀는 몇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썼고 또 가명으로 자신의 부고를 써서 신문에 싣기도 했다). 이 책을 쓰는 데에는 그런 기사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독일을 폴리티켄 지와 몇몇 덴마크 신문을 많이 참조하여 집필하였다. 이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취재 자료는 릴리 엘베의 일기와 그녀의 편지들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니엘스 호이어(Niels Hoyer)가 정리하여 <남자에서 여자로(Man into Woman)>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다.
릴리 엘베의 일기 초반부에는 에이나르의 변화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릴 리가 바이에네르의 작업실에 처음 나타난 날이라던가 에이나르의 이상한 출혈, 신체적 변화 그리고 드레스덴 여성병원에 입원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이런 사건들을 묘사할 때 릴리 엘베의 진짜 기록을 잘 정리해 놓은 니엘스 호이어 씨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에이나르 바이에네르의 이야기 가운데 많은 부분을 바꾸었다. 그러니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소설은 에이나르 바이에네르의 전기가 아니며,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도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지금 현재에도 생존해 있는 실제 인물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P442-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