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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4. 2024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년

애니메이션 <태일이>(2021)   

  

조영래와 전태일의 인연은 1970년 전태일의 장례식이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주관으로 치러졌을 때 조영래가 참석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조영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면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중 3년의 시간을 들여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고 생존 당시 전태일과 함께한 청계천 노동자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빈다. 그리고 장기표가 이소선으로부터 전해 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정리하여<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집필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全泰壹)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인간선언.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더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그는 말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한 것이라고.

그는 고발하였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면서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면서도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고. 이들은 “모든 생활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다”고.

그리하여 그는 맹세하였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그는 싸웠고, 그는 죽어갔다.                      (P8-9)    

 

태양은 마른 대지 위의 그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것같이 이글거린다.

열네 살의 한 소년이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옛날 그가 살던 영도(影島)다리 쪽으로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국제시장 어느 양화점 쇼윈도 그늘진 곳에서 잠시 갈증나는 더위를 피하고 있다.  

소년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아,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기에 전부다 다 행복한 얼굴들일까?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계절에 맞지 않는 헌 때뭉치 옷을 입어야 할까? 누구 하나 그 소년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전태일의 어린 시절이었고 짧은 평생의 기록이었다.         (P13)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 3개 시장과 신평화시장 및 근접 건물들을 합친 작업장의 총 숫자는 약 800개이며,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노동청의 집계에 의하면 3개 시장을 합하여 428개 작업장에 노동자는 7,600여 명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특히 노동자의 숫자는 노동청이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각 업주들이 신고한 숫자를 그대로 합산한 것이었다. 업주들은 자신의 업체가 근로기준법 규정의 고용을 받는 종업원 16인 이상의 업체가 되지 않도록 실제 숫자보다 훨씬 줄여서 신고하였으므로 위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P80)  

   

이중 한 예로 평화시장의 경우를 보면, 총 인원 약1만 명 가운데 미싱사(미싱보조 포함)가 4,000명, 재단사가 300명, 재단 보조가 400명이었고 그밖에 시아게, 공장장, 점원을 합쳐 300명, 업주는 1,000명 정도였다. 이중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이 여공들이고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주로 남자들로, 평화시장 일대를 통틀어 여공이 약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시다’란, 말이 견습공이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된 임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라서, 보조 없이는 일해도 시다 없이는 일 못한다고 할 정도이다. 시다의 직책은 작업장에 따라 또는 작업의 종류에 따라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미싱사(혹은 재단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것이 시다의 일이며, 하루 종일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실과 단추를 나르는 일부터 업주나 미싱사나 재단사의 사적인 잔심부름까지도 하게 되는 무척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다. 

시다는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다. 일이 바쁜 철이면 평화시장 일대의 공장들 문 앞에는 ‘시다 구함’이라는 구인광고가 몇 공장 건너 하나씩 나붙어 있을 정도로 일자리는 많다.                (P82)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전태일이 처음 시다생활을 시작할 때의 기록이다.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일당 50원, 기막힌 저임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P87)     

1969년 겨울 어느 날의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그의 눈에 비치는 시다들이야말로 바로 “.....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버린 인간 그 자체였다. 아니 시다들이나 미싱사들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도 그러하였고 그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불행한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그는 시간이 감에 따라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뒷날의 일이고, 다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두어야 할 것은 그러한 그의 뒷날의 사상이 이때 시다들과 매일매일의 접촉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P114-115)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안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가끔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인간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가 되어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중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진보이다.           (P126-127)   

  

노동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정하며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써 보충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가입할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 23조의 3,4항>                  (P140)    

 

태일은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며 차차로 노동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짐작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옛날 자기들이 파업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여 실패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하였을 때에는 무척 실의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얘기로 용기가 꺾이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렬한 용기와 새로운 투지를 얻었는데, 특히 아버지와 얘기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전신에 새로운 희망과 확신과 환희가 벅차올랐다.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중대사건 중의 하나였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킴....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라고 그 법 제 1조에 못 박혀 있다. 이제껏 ‘모든 환경으로부터 거부’당하며 살아온 전태일에게는, “근로자의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기 위하여 법률이 마련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암흑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듯 한 놀라운 환희였다. 근로자에게도, 모든 것을 빼앗긴 지지라도 천한 핫빠리 인생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는 것이로구나.            (P143)     


왜 전태일은 근로조건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재단사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로 하자고 제의하였는가? 또 어째서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던 것인가?

전태일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 또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재단사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는 나이가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고 막으면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리가 한번 바보답게 되든 안 되든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 이것이 그의 제안의 내용이었다. 

태일의 이러한 설명이 끝나자 좌중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만장일치.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한두 사람의 찬성 발언을 거쳐 전체 의사로 채택되었다. 태일의 설명은 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좋다, 우리는 바보다!”하는 어떤 법열(法悅)과 같은 감동과 연대감이 각자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응어리져 올라와 소리 없는 함성으로 그 자리에 메아리쳤다. 이제 그들은 ‘바보’로 살아오다가 또 다른 뜻의 ‘바보’로 새출발을 한 것이다.                    (P152-153)  

      

사회는 이러한 인간을 여러 가지 그럴 듯한 표현을 써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미화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는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된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회사원의 경우는 사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그것이다. 노동자의 경우는 기업주가 필요로 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사람이 바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지배하고 명령하는 강자의 이익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강자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 모든 내면적 욕구와 의지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 기능, 노동력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상이며, 또 그 참혹한 전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상이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유보다는 책임을” 숭상하라고 하는 요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그들의 비장의 주문이다.           (P155)     


조직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이제 전태일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움직인다기보다 조직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더욱 집요하고 열렬하게 노동운동에 달라붙어야 했다. 바보회가 창립된 지 얼마 후 그는 어머니에게 빚을 내어 책 한 권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느 노동법 학자가 쓴 근로기준법 해설서(勤勞基準法解說書)였다. 정가가 2,700원이었는데 어머니한테는 엄청난 액수였다.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하도 간절하게 부탁하는 데 못 이겨 동네 사람들에게 며칠에 걸쳐 1,000원씩 500원씩 빚을 얻어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그날 저녁 시내에 나가 책을 사들고 들어온 태일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그는 근로기준법의 딱딱하고 알기 어려운 조문들만 가지고 씨름해왔지 그 내용을 풀이한 책을 못 보았다.       (P165-166)  

   

전태일. 1969년 가을, 그는 고독하였다. 

서울에 와서 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세월 동안 현실의 냉혹한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그의 가슴에 쌓여온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은 너무나도 많았건만 그러나 그 말을 누구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온 세상이 ‘현실과 한패’가 되려고 침묵속으로 떠나버렸을 때 홀로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 짓밟히는 인간들의 괴로운 영상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그의 외로운 길을 누가 있어 동반한단 말인가? 외로운 나머지, 외로움에 너무나도 시달려 지친 나머지 그는 허탈하였다. 

나는 삼거리에 이정표(里程標)처럼 누가

같이 가자고 하는 이가 없구나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 

-1969년 9월 말의 낙서에서                           (P195)     


세상은 그의 불우한 과거를 보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 자신의 과거를 손가락질 한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한다면 그는 주체성을 잃은 인간, ‘현실과 한패’가 되어버린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하가 되는 것이 아니냐?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P204)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전체의 일부”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가는 “생각할 줄 알며,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며, 다 같이 “고귀한 생명체”로 본능과 희망을 갖춘, “가치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이다. 인간은 또한 “서로서로를 필요로”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의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인간적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P207)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P209)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공평한 입자(粒子)인가, 공평한 입자인가?

불공평한 분수에는 공평한 대수(代數)를!

인생이란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 그것이다. 

천차만별. 인생 무대는 웅대(雄大)했지만 배우는 작았다. 인간은 백 가지 욕망을 가진다. 그렇지만 겨우 한두 가지를 달성하고 죽을 뿐이다. 죽음 그 자체를 증오하기에 앞서, 생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 생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면 죽음 그 자체를 감사해라. 앙상한 가지마다 잎새는 매달렸지만 짓궂은 북풍은 앙칼지게 발버둥치는 매달림을 비웃는다. 

-1970년 1월 7일                        (P217)     


.......

우리의 이름이 바보라 바보처럼 살 수밖에 없나 보다. 

이름을 바꿔서 만인을 위해 횃불을 밝히고자 약속하던 그날,

처음엔 비웃던 레지양들이 마감시간이 넘도록 나가달란 말도 못하던 모습.

이미 그것은 우리의 진심에 감동해서였으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난 바보 아닌 삼동회의 일들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으리라.

-고 전태일 1주기 추도식 삼동친목회 대표의 추도사에서

삼동(三棟)이란 함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다. 삼동친목회는 1년 전에 창립되었던 바보회를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바보회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조직으로 보아야 한다.              (P251)    

 

세상으로부터 버림만 받아온 그들, 고층건물이 곳곳에 솟아 있는 수도 서울에 살면서도, 바로 창문만 열면 삼일고가도로를 호기롭게 달리는 자가용의 화려한 행렬을 볼 수 있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햇빛조차 주어지지 않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온종일 꼿꼿이 앉아서 손발이 닳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들. 굶주림과 질병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서도 세상의 철처한 무관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 좋은 것은 모두 남들의 것, 더욱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죽여 흘러가던 용암이 분출구를 만나 지맥(地脈)을 찢고 드디어 터져오르는 듯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인간인가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보다.......”           (P267)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온 전말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로서는 해결이 안 나겠으니 10월 20일 날 노동청 정문 앞에 가서 데모를 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10월 20일은 노동청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전태일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노동청의 약점을 치자고 하였다. 

평화시장 들어온 지 6년. 그 노동지옥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전태일의 노력은 결국 이 ‘데모’라는 두 글자로 귀결된다. 

시다들에 대한 개인적인 온정, 진정과 호소, 모범기업체 설립 구상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보았으나, 아무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었고 결국은 데모를 선택했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실력대결 방법뿐이었다.                    (P274-275)     


11월 7일. 약속한 날짜가 되었건만 약속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하였다. 정해진 거사 일자는 11월 13일. 시각은 역시 오후 1시. 전태일을 포함한 세 명의 회원이 플래카드를 만들 책임을 맡았는데 구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하였다. 연설은 탁자 하나를 준비해뒀다가 노동자들이 모일 때 그 자리에 내어놓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 중요 조문들을 소리내어 읽고 “이런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라는 취지의 선동연설을 하여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그리고 나서는 전태일이 구호를 선창하고 회원들과 모인 사람들이 복창하면서 곧바로 데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화형식을 위하여 전태일은 휘발유통 하나를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P282-283)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힌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 --인간을 물질화하는 ‘부한 환경’--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없어도 될 악마’의 야만적인 질서,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                (P284)    

 

11월 13일을 며칠 앞두고부터 전태일은 마음이 고요하지를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던 책.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내며 뚫어지게 보고 또 보던 책. 그의 모든 희망의 원천이었던 노동자들의 권리와 장전(章典). 그것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근로기준법이 있어서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참상은 더욱더 숨겨졌다. 전태일의 가슴은 더욱 분노로 터졌던 것이다. 있으나 마나한 법, 한 장의 휴지조각 --8시간 노동제는 다 무엇이며, 주휴제, 야간작업 금지, 시간외 근무수당, 월차휴가, 연차휴가, 생리휴가, 해고수당 따위가 다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란 말인가?

“평화시장을 보라!”              (P295)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는 몇 마디의 구호를 짐승의 소리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화염이 확확 들이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이 이루어졌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불은 꺼졌다. 흩어져가던 노동자들과 길 가던 행인들까지도 갑자기 일어난 불길을 보고 와서 웅성거렸고, 뒤늦게 평화시장에 나타났던 기자들고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들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P301)     


어머니가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애원을 하니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만 받았을 뿐 서너 시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들과 같은 차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갔다. 차 안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 되나 지켜볼 것이오”하면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성모병원에서는 그를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의사의 진단은 희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도 별 다른 치료를 해보지 못하고 거의 환자를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는 내내 옆에 서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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