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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9. 2024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뒤마클럽>

영화 <나인스 게이트>  1999년

『뒤마 클럽』은 1993년 출간 당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출판계와 비평계에서 대중 장르에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으로 치달아 버렸다는 끔찍한 애정과 찬사를 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럽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작가의 명성을 재확인시키고,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1999년 [나인스 게이트(The Ninth Gate)]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고, 추종적 성향의 독자들에 의해 'icorso'라는 매니아 클럽 혹은 동호회 사이트를 열게 만들 정도로 열띤 호응을 받았다.     

<뒤마 클럽>은 로먼 폴란스키에 의해 <나인스 게이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뒤마 클럽>이라는 소설이 지닌 조금은 복잡한 플롯을 폴란스키는 단순하게 풀어내버린다. 뒤마 클럽이라는 원제가 암시하듯이, 이 영화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와 저주 받은 고서인 <나인스 게이트>라는 책 두 권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죄다 읽었다는 말이요?” 나는 내친 김에 물어 보았다. 

“아닙니다. 책을 다루긴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요.”

거짓말이었다. 그는 분명 이곳에 오기 전에 나의 글을 보았을 것이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인쇄되어 나온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더라도 게걸스럽게 읽어 치우는 무지막지한 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P20)     

숱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코르소는 자신의 뇌리를 스치듯 지나가는 어떤 영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모습, 검은 옷을 입었던 인물, 리아나 타이예페르의 집 앞에 세워져 있던 재규어의 운전 기사, 톨레도에서 벤츠의 핸들을 잡고 있던 남자..... 그리고 흉터가 있는 얼굴.....

그때서야 코르소는 다급하게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그자는 <삼총사>에서 밀레이디와 연관이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자는 묑의 여관 앞에서 마차의 조그만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밀레이디와 대화를 나누던 인물이었다. 그 장면은 작품의 첫 장에 있었다.

.....40, 또는 45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 무엇인가를 꿰뚫어버릴 것 같은 깊고 검은 눈, 창백한 얼굴빛, 강한 인상을 주는 콧날, 말끔하게 손질된 검은 콧수염....

로쉬포르, 그자는 추기경의 왼팔 역할을 하는 대리인이자 다르타냥의 적이었다. 작품의 첫 장에서 그자가 코레빌에게 가는 추천장을 훔치는 바람에 다르타냥은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를 상대로 어쩔 수 없는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자는 죄인인 셈이었다.

이 엉뚱한 비약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코르소는 혼돈에 빠진 채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설에서 밀레이디의 동료로 나오는 등장 인물이 톨레도에서 차를 몰고 돌진하는 미지의 인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두 인물 사이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작품의 첫 장에는 그 점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었지만, 코르소는 소설 작품 속의 인물 역시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기억을 되살려가며 책장을 넘겼다. 그 장면은 다르타냥이 자신이 겪은 일을 트레빌에게 얘기하는 제3장에 묘사되어 있었다.

“얘기하게.” 총사대장 트레빌이 다르타냥에게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그자는 혹시 관자놀이 부위에 가벼운 흉터 자국이 있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마치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자국이.....”

관자놀이 부위에 그어지 가벼운 흉터. 대답은 거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코르소가 기억하는 검은 옷을 입은 운전 기사의 흉터는 로쉬포르의 그것보다 큰 상처 자국이었다. 더욱이 그자의 흉터는 정확히 말해서 관자놀이 부위가 아니라 뺨이었다.

그러나 코르소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번에는 소설의 등장 인물과 미지의 인물의 차이, 즉 흉터의 위치나 크기 차이가 아니었다.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긴 코르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은 한참 후였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의 혼돈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얼굴 색의 차이였다. 마차의 작은 창문 왼편에 서 있던 인물, 깃털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던 인물, 코르소를 착각하게 만든 그 인물은 소설 속의 로쉬포르도, 톨레도의 인물도 아닌 영화에서 로쉬포르 역할을 맡았던 라나 터너의 얼굴 색이었다. 게다가 로쉬포르 역할을 맡은 그 영화 배우의 흉터는 오른쪽 뺨에 있었고, 위에서 아래로 길게 그어져 있었다. 따라서 코르소가 떠올린 기억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할리우드 자식들!  

그때서야 코르소는 자신의 혼돈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혼돈이 문학 텍스트와 할리우드 영화라는 장르가 갖는 일종의 대중적 교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미망인 리아나 타이예페르를 방문했을 때부터 그가 느꼈던 공허한 불안감은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빚어진 기이한 착각 이상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결론이 그 자체의 복잡함과 한계점을, 어떤 얼굴을, 어떤 상황을, 어떤 인물들의 측면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뒤마와 17세기의 책, 악마와 <삼총사>, 밀레이디와 종교 재판소의 불구덩이..... 그 모든 것은 착각에서 나왔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여전히 구체적인 것보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것이었고, 사실보다는 소설적이었지만.              (P140-149)

     

‘리스본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채 50분도 되지 못했지만 상타 아폴로니아 역에서 로시우 역까지 가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거기서 1시간 30분 뒤, 코르소는 신트라의 플랫폼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멀리 구름이 낮게 깔린 언덕 위로 회색 첨탑들이 솟아 있는 페나 성이 보였다.’                    (P218)     


“실제로 <삼총사>를 쓴 사람은 누구입니까?”

순간 색인함을 정리하던 서적상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힐 수 없소.” 한참 후에 그가 대답했다. “그 질문은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식의 대답을 강요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마케는 자료가 풍부하고 역사에 정통한데다 독서량도 엄청났지만 그것들을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작가적 재능이 부족했소.”

“두 사람의 관계가 좋게 끝나지는 않았겠군요.”

“그렇소.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요. 당신은 혹시 두 사람이 스페인의 이사벨 2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동행한 사실은 알고 있소? 그 여행을 통해 뒤마는 <마드리드에서 카디스까지>라는 서간 형식의 글도 발표했는데...... 아무튼 좋아요. 마케는 뒤마가 발표한 소설 중에 18편이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법정으로 몰고 갔지만 단지 습작 단계에 불과하다는 판결을 받았어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명성을 빌렸다. 그거요. 물론 한 거인의 그늘에서 착취를 당한 희생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선생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서적상은 문 쪽에 있는 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뒤마의 초상화에 멈추어 있었다.

“이미 얘기했지만 나는 발칸 씨 같은 전문가가 못 되오. 나 같은 사람은 한낱 책이나 팔아 먹고사는 장사치에 불과하단 얘기요.” 그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자신의 직업과 개인적인 기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소. 1870년과 1894년, 그러니까 약 25년 동안 뒤마의 작품은 프랑스에서만 무려 3백만 권의 책과 8백만 부의 연재지가 팔렸다는 사실이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다시 말해서 뒤마의 작품은 마케를 만나기 이전에도 팔렸고, 마케와 함께 했던 동안에도 팔렸으며, 마케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팔렸다, 이거요.”     

“적어도 평생을 명성 속에 살았겠군요.”

“그거야 두말 할 것도 없소. 유럽 전체가 무려 반세기 동안 뒤마에게 모든 것을 내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남북 아메리카는 선박을 보내 뒤마의 소설을 실어 나르기 바빴고, 카이로, 모스크바, 이스탄불 등 수많은 나라와 도시의 독자들은 뒤마를 읽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어요. 한편 뒤마가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자신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향락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오. 작가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생활했고, 즐겼고, 배를 띄웠고, 저택들을 수선했고, 적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을 겪기도 했고, 사랑했고, 먹고 마시고 춤을 추었고, 천만 프랑을 벌어 그 곱절이 되는 이천만 프랑을 썼고, 그러다 잠든 아이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았어요.” 서적상은 마케의 백색지에 수정된 작가의 글씨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이런 뒤마의 모습을 두고 타고난 재능과 천재성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작가는 누가 뭐라고 말하든 결코 즉흥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다른 작품을 훔치지도 않았어요.” 그 부분에서 서적상은 마치 포르토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어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때리며 덧붙였다. “뒤마는 바로 이 속에 살아 있소. 뒤마는 그 어떤 작가도 생전에 누리질 못했던 영광을 마음껏 누렸어요. 뒤마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든 것을 성취했어요. 마치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뤄낸 사람처럼 말이오.”

“그랬군요.” 책사냥꾼이 그 말을 받았다. “그게 악마와의 만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P308-310)     

'난 선물 따윈 좋아하지 않소.'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언젠가 어떤 사람들이 목마를 선물 받았는데, 그 공예품이 아케아 산이었다고 하더군... 얼빠진 인간들 같으니라고.'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은 없었나요?'

'한 사람, 딱 한 사람이 자식들을 데리고 빠져나왔는데, 바다에서 솟구쳐오른 괴물들은 그 자식들을 멋진 조각가 그룹으로 만들었소. 아마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들이 바로 '로도스 섬 학파'가 되었을 거요. 어쨌든 그때만 해도 신들은 지나치게 편파적이었소.'       (P313)     


영화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관대하잖아.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영화도 좋아. 왜냐하면 두 사람만이 볼 수 있고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당신의 책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야. 고독해. 책은 둘이 함께 읽을 수 없고, 책을 펼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깨지는 거야. 당신처럼 오로지 책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내가 두려워하는 게 바로 그거야.               (P324)     


'나폴레옹도 블뤼허와 그뤼쉬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질렀지요. 이렇듯 군사 전략 역시 문학만큼이나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요. 잘 들으시오. 코로소씨. 당신이 생각하는 순진한 독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소. 독자들은 텍스트 앞에서 자신의 교활한 방법으로 그것을 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았던 텔레비젼과 영화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독자는 작가가 제공하는 정보보다 자신의 정보를 첨가하게 되는 건데, 당신은 거기서 실수하고 말았소.'                     (P510)    

 

그때서야 책사냥꾼 코르소는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기 전에 잔인한 늑대처럼 하얀 이를 드러낸채 씨익 웃었다. 하긴 책들이란 이런 종류의 얘깃거리들도 담고 있는것 아닌가. 그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기에 각각의 책은 각각의 악마를 갖게 되는 것이고.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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