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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30. 2024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

영화 <인 더 컨트리 오브 라스트 씽>  2020년

도시에 살면 뭐든지 그냥 지나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잠시 눈을 감고 돌아선 다음 눈을 떠 봐라. 방금 전에 눈앞에 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다. 영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 머릿속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런 덧없는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일단 사라지고 나면 그뿐. 그게 끝이다.   (P10)     


이건 분명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걸음을 계속 옮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에 익숙해야 한다. 덜 원하고, 덜 만족하고, 덜 필요로 하면 부유해진다. 이 도시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이거다. 마음속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 이 도시다.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면서도 그 삶을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것이 이 도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아니, 피하든지 피하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혹 지금은 피할 수 있다 해도 다음은 확신하지 못한다. 피하지 못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P11)    

 

통행세를 부과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옛장소는 어느 날인가 사라지고 없고, 딴 곳에 그런 장애물이 새로 생긴다. 따라서 어느 길을 가야 하고 어느 길은 피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도시가 야금야금 사람들에게서 확실성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도 정해진 길이 따로 없다. 필요한 것이 없어야 생존할 수 있는도시다. 사전 예고가 없어도 쉽게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하던 일을 금방 접을 줄도 알아야 하고, 거꾸로 안 하던 일도 얼른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엔 모든 게 다 하나하나 문제가 되는 사례인 셈이다. 따라서 어느 경우든 그 징후를 읽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눈이 흐려지면 코라도 예민해야 한다.                      (P16)     


많은 사람들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일부러 애쓰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간다. 희망이 사라지고, 희망의 가능성마저 포기해 버리고 나면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꿈으로, 어린아이의 생각고 같은 유치한 생각과 유치한 이야기로 세우고 싶어한다. 그래야 세상을 버텨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다. 괜한 호들갑 없이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털썩 앉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먹을 것이 물론 주된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다.   (P20) 

     

이 모든 것이 바로 환영(幻影)의 언어다. 환영의 언어는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의 대부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하며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그것은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이런 식이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해가지지 말았으면 하는 거야.> <내 주머니에 돈이 자꾸 불어났으면 좋겠어.> <이 도시가 옛날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얘기라도 좋다. 허황한 이야기, 유치한 이야기 –아무 의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면 된다. 대체로 사람들이 굳게 믿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옛날에 아무리 나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오늘날의 그 어떤 것보다 낫다는 믿음이다. 이틀 전의 것이 어제의 것보다 더 좋다. 과거로 되돌아가면 갈수록 세상은 더 아름답고 살 만한 세상이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보이는 것은 분명 그 전날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잠들기 전의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지금>의 현재가 단순히 헛것에 불과하다는 미몽에 빠질 수 있다. 마음에 안고 사는 옛날의 기억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헛것, 그래서 현재의 아픔을 잊을 수가 있는 것이다.     (P21-22)   

  

환상이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나는 절대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헛된 환상을 쫓는 사람들, 그들은 항상 잠을 자다 죽는다. 그전에, 한달이나 두 달 정도 그들의 얼굴엔 아릇한 웃음이 감돈다.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듯, 제 모습이 아닌 딴 사람이 된 듯한 기묘한 기운이 그들 주위에 감돈다 싶으면 영락없다. 그 징후는 틀림없다. 뺨에 살짝 감도는 붉은 기운, 갑자기 커져버린 두 눈, 혼미한 발걸음,  하체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 ㅡ 이런 것들이 죽음의 징후다. 하지만 행복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P23)     

나는 때때로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 가운데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 있지 않나 깊다. 죽음은 우리의 예술 형식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P26)     

많은 관찰 끝에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의 하늘이 당신 머리 위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구름, 똑같은 햇살, 똑같은 폭풍, 똑같은 고요, 똑같은 바람, 그런데도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하늘 아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일 것이다.                (P36)   

  

예를 들어, 소수이긴 하지만 나쁜 날씨는 나쁜 생각에서 연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의견은 날씨 문제에 대해 다소 신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의견의 바탕에는 사람의 생각을 물리적 세계의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내가 어떤 암울하고 염세적인 생각을 하면 그것이 하늘에 구름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P43)     


이곳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얘기들은 잘한다. 특히 자기네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이곳에 와서 참 묘하다고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너지고 와해되는 만큼 계속 지속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한 세상이 무너지려면 많은 세월이 소요된다. 그동안 우리 삶은 계속될 것이고, 또 우리 각자는 자신이 겪은, 작은 인생 드라마의 목격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P47-48)     

각 구역마다 자체 발전소가 있는데, 그 발전소의 주 연료가 바로 쓰레기다. 자동차 연료, 난방연료 ㅡ 이 모든 연료가 바로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메탄 가스에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이곳에서는심각한 문제다. 똥이 주요 사업 품목이다. 그래서 길에서 허락 없이 똥을 수거하는 사람은 발견 즉시 체포된다. 만일 두 번 적발되면 그때는 자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제도가 이러니 어디 웃음이 나오겠는가.           (P52)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이 특별히 높은 건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 도시에 온 이후 건물 옥상에 올라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나는 엉망인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저 먼 지평선 너머, 희미한 푸른 빛이 띠를 이루며 아른거리는 풍경이 보였다. 바다였다. 그런 상황에서 바다를 본다는 것이 묘한 기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격처럼 다가왔다. 내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이 도시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도시 너머에 다른 것이 존재하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계시(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내 폐부로 시원한 산소가 몰려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만해도 어지러운 황홀이었다.          (P114)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 어떤 곤경에 빠질지 짐작은 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억 역시 사라진다는 점이다. 우리 뇌에 어둠의 영역이 형성되기 때문에 만일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금방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진다. 이곳에 저주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기억 상실증과 같은 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 역시 나의 내면에 텅빈 어둠의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사라지고, 그리고 한참이 지나 그 사물을 떠올리려고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다. 결국 기억이란 의지의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일어나는 작용이며, 따라서 늘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화하는 상황에선 뇌도 삐걱거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뇌에 저장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P132-133)  

   

그 시절이 내 생애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이 도시에서의 삶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느 곳에서 이루어진 삶이든 내 전체 삶의 여정에서 정말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 악몽의 시대에 내가 그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묘한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사무엘과 함께 사는 일이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겉으로 봐서는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예전과 변함없이 똑같은 갈등,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똑같은 문제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희망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의 고토가 끝나리라는 믿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 — 이것이 예전과 다른 큰 차이였다.                 (P161)    

 

사실 살다보면 내리기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또 대개 그런 결정들은 마음에 큰 부담을 주는 선택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경우,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람들은 결정을 내린 후에도 후회를 하게 되며, 죽을 때까지 후회를 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이다.    (P203)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을 포기했소. 내 삶의 목표는 주변 환경에서 나 자신을 지우는 것이었지. 더 이상 나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것이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소. 나는 하나하나 나와 관련된 것을 다 버리기 시작했다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 그냥 그렇게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었소. 무관심, 그래요, 그런 무관심이었소. 초연한 무관심, 그 어떠한 공격과 괴로움으로부터도 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무서운 무관심 말이오. 안나, 난 당신에게도 작별을 고했소, 책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도 다 지우고 말았소. 더 나아가 나 자신하고도 작별을 고하고 싶었소. ....... 내 육신만 없었다면, 속을 채우고 속을 비우라는 몸뚱어리의 요구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을 거요.            (P244)     


내가 지금 바라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당신의 옛 친구 안나 블룸이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 도착하면 그때 당신에게 다시 편지를 쓰도록 하겠다. 꼭 다시 쓸 것이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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