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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4. 2024

광화문에서 #10

십자가

지난날의 기나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필립은 과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삶을 그처럼 힘들게 만들었던 불구도 받아들였다. 불구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불구 때문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내면 성찰의 힘을 기를 수 있었음도 아울러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조롱과 멸시를 엄청나게 받아왔지만 그 조롱과 멸시는 그의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했고, 영원히 그 향기를 잃지 않을 정신의 꽃들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그러고 보면 온 세상이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까닭이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은 불구이고 마음은 비뚤어진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병이 들어 심장이 허약하거나 폐가 허약했고, 어떤 사람들은 정신에 병이 들어 의지가 나약하거나 밤낮없이 술만 찾았다. 이 순간 필립은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자와 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맹목적인 우연의 무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필립은 그리피스의 배신을,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밀드레드를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네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한가지 분별 있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잘못은 참아내는 일뿐이다. 그리스도가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인간의 굴레2, 서머싯 몸, p49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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