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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5시간전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錦繡)>

영화 <환상의 빛>  1995년

<환상의 빛>을 모티브 삼은 서간문학 <금수(錦繡)>.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중 한 편으로 평가받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의 원작 단편집에서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현대 일본 서정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환상을 잃어가고 그 자리에 현실이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첫 장편 연출작이다.     

이번에 케이블카에는 우리 모자뿐이었는데, 저는 다시 거기서 절정인 단풍을 보았습니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것이 아니라 상록수나 갈색 잎, 은행잎 비슷한 금색 잎에 섞여 새빨갛게 우거진 숲이 단속적으로 케이블카 양옆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붉은 잎은 한층 더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만 종이나 되는 무수한 색채의 틈으로 커다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생각에 휩싸여 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넋이 나간 채 그저 울창한 수목의 배색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뭔가 무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다양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로 하면 아마 몇 시간이나 걸릴 것을, 단풍이 하나하나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짧은 순간에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요? 당신은 여전히 또 꿈같은 말을 한다고 웃으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격정적인 단풍의 색조에 취한 채 수목 속의 불꽃에서 확실히 뭔가 무서운 것을, 게다가 괴괴히 가라앉은 차가운 날붙이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P16)     

우리는 화원 한가운데로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로, 위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벤치에 앉아 야마가타 역 앞에서 사 온 야케를 입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고 우주의 반짝임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아아, 별들이 어쩌면 그렇게 쓸쓸하던지요.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별들이 어쩌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지요. 저는 당신과 10년 만에 도호쿠의 산속에서 뜻밖에 재회한 것이 어쩐 일인지 무척 슬픈 사건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것이 슬픈 일이었던 걸까요? 저는 얼굴을 들어 별을 바라보면서 슬프다, 슬프다,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한층 슬픔이 더해지더니 10년 전의 그 사건이 스크린에 비치듯이 되살아났습니다. (P18)     


사건 이래로 그렇게 하는 것이 버릇인 양 저는 대합실에서 병실까지 이어진 긴 복도를 흠칫흠칫 주뼛거리며 걸어갔습니다. 당신의 체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사건에 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말자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병원 복도를 걸을 때마다 억누르기 힘든 감정의 물결과 함께 한심하고 분한 마음이 끓어올라 차라리 분노나 질투, 동정을 포함한 말을 실컷 퍼부어 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P26)    

 

유카코 씨 아버님이, 내온 차는 입에도 대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돌아간 후 저는 오랫동안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일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유카코 씨의 관계에 문득 애정이라는 말을 놓아 봤습니다. 어쩐 일인지 그 말이 현저하고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제 가슴속에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당신과 유카코 씨 사이에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라는 것만이 아닌, 저 같은 사람은 도저히 밀치고 들어갈 수 없는 강한 애정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안에서 그 생각은 점차 부풀어 오르고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되어 눌러앉기 시작했습니다. 일시적인 남녀의 유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런 게 아니라 거기에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열렬하고 비밀스러운 애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억누를 수 없는 질투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 당신에 대한 저의 애정이 소리도 없이 쓰윽 녹아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생겨난 것은 증오라는 감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대학 1학년 때 알게 되어 스물세 살에 결혼할 때까지 5년간 연애하던 시절과 부부로서 보낸 2년 3개월의 세월을 생각하고, 그보다 더 오래된 당신과 유카코 씨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 이미 죽었고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세오 유카코라는 여성이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예의 그 멍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차가운 것을 발산하는 얼굴의 당신이 이쪽으로 향한 채 서 있었습니다. 저의 존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유카코 씨와 당신 사이에는 애처로울 정도로 깊은, 은밀하고 열렬한 애정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P35-36)     


그녀는, 전부터 좀 좋아했지만 오늘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고 속삭이며 볼을 바짝 대고 입술을 핥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열네 살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남자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오 유카코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하나의 업보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업보라는 말이 대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유카코라는 여자를 떠올릴 때 가장 적절한 울림을 갖고 제 마음에 떠오릅니다.  (P57)     

이미 수령이 퍽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던 뜰의 은엽 아카시아가 올해도 노랗고 미세한 솜털 같은 꽃을 가득 피웠습니다. 가루 같은 그 꽃을 좋아해서 적당한 가지를 잘라 꽃꽂이를 하려고 가위를 들고 뜰로 나섰습니다. 살짝 닿기만 해도 부스스 꽃잎이 흩어지기에 자른 가지를 가만가만 조용히 옮겼는데 그래도 흩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은엽 아카시아 가지를 손에 들 때마다 저는 늘 순간적으로 애달픈 듯한, 서글픈 듯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설마 답장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보낸 두툼한 편지를 손에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봉투를 뜯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마치 은엽 아카시아꽃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P69-70) 

    

편지를 씀으로써 대체 제가 뭘 얻으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어쩐 일인지 당신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고양되어 있습니다. (P75)     

저는 그때까지 거의 클래식 음악에 흥미가 없었고 주인이 말한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을 이해할 감성도, 소양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모습과 가게 안에 흐르는 조용한 심포니를 듣는 중에 문득 한 단어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뇌리에 스쳤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순간 죽으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떠오르더니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심포니 한 곡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신묘한 선율, 그리고 동시에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덧없는 세계를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선율처럼 느껴졌습니다. (…) 게다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이다지도 열렬하게 슬픔과 기쁨의 공존을 사람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저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어린잎이 난 큰길의 벚나무 가로수를 창 너머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얼굴도 본 적이 없고, 분명히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세오 유카코 씨의 용모며 표정을 멋대로 상상하면서 모차르트 심포니의 잔물결 같은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P80)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어서 저는 커피 두 잔 값을 테이블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인도 일어나면서 조금 전에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을 알 것 같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려 달라고 웃으며 물었습니다. 어제오늘 모차르트를 접한 저에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가능 할 것 같지 않았고, 모차르트 음악에 매료되어 수천 번, 또는 수만 번 곡에 귀를 기울여 온 주인에게 저 같은 사람이 경솔한 감상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주인의 눈빛에 그만 무심코 말해 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주 불가사의한 것을 모차르트의 부드러운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P86)    

 

다 타버린 지붕이 큰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 순간 수많은 구경꾼이 엉겁결에 일제히 뒷걸음질을 칠 만큼 불티의 물결이 덮쳐 왔습니다. 주인도 제 팔을 잡고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저는 한순간의 열기를 견디며 불티를 온몸으로 받아 냈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했을까요? 다만 저는 기세를 잃었나 싶다가도 갑자기 힘을 되찾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이 그래도 서서히,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마음속에 올라온 당신의 영상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아 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고집스럽게 몸에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P94)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왜 모차르트 음악에서 그런 엉뚱한 것을 떠올렸을까,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다 타버린 자신의 가게 앞에서 주인이 제게 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결코 하지 않았던 말. 그가 저의 엉뚱한 말에서 멋대로 만들어낸 말.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 생명의 불가사의한 구조. 아직 젊은 여자인 저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끌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39번> 심포니의 잔물결 같은 선율이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녘의 침실 구석구석까지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게 느껴지면서 저는 그 말이 인생에 흩뿌려진 무수한 비밀을 한꺼번에 해명해 보이는 뭔가 터무니없는 마술의 수법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P99)     

아리마는 좋은 사람이었어. 난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지. 일, 일, 일로 가정을 돌보지도 않고 계속 일만 해 왔고 냉철할 정도로 타인을 자신 안에 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말이었던 만큼 거기에는 강한 설득력과 애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예전의 내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마음속 깊이 내 행복을 생각해 주고 있다. 이런 두 가지 생각이 뜨거운 물처럼 몸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건 당신에 대한 한심할 정도의 미련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홀연히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에 떠돌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P106)     


저는 요즘 저의 '지금'은 과거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고 확실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발견은 아닙니다만, 그런 것은 당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특별히 내세워 생각해 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뭔가 새로운 대발견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과거는 틀림없이 저에게 현재를 가져다주는 작용을 했겠지요. 그렇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의 과거에 의해 이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정해지고 만 걸까요? 이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142)     

할머니는, 사람은 죽어도 반드시 언젠가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그 증거라며 어린 자신에게 태어날 때부터 네개뿐인 왼손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드는 손을 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뒤 왜 자신의 기형 손가락을 찬찬히 보게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그 손가락이 자신에게 한가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나는 어쩌면 죽은 아들들과 또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만날것이다.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다시 귀여운 아들들중 세명을 만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할데 없는 기쁨이 느껴져 눈물을 흘리고, 비할데 없는 슬픔도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네개밖에 없는 손가락을 몸빼 바지의 주머니에서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내 서서 그 기분 나쁜 손을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 자신도 오싹해질 만큼 추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추함과 무서움의 덩어리 같은 타고난, 네 개밖에 없는 손이 왠지 이 세상에서 다시 한번 아들들과 틀림없이 만날 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P172-173)

     

내 아이는 왜 그런 불행을 짊어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왜 그 할머니에게는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었는가, 왜 그 사람은 흑인으로 태어났는가, 왜 그 사람은 일본인으로 태어났는가, 왜 뱀에게는 손발이 없는가, 왜 까마귀는 까맣고 백조는 하얀가, 왜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에 시달리는가, 왜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추하게 태어나는가……. 기요타카라는 인간을 낳은 어머니로서 저는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합리한 불공평이나 차별의 진정한 원인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P193)     

10년 전의 그날 밤 이곳 기요노야의 한 방에서 뭔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뭐였는지 저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과의 이별, 그리고 저라는 인간의 전락 같은 것이 아닌, 좀 더 커다란 뭔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죽어 가던 내가 본 것은 뭐였을까? 그건 제 목숨 자체였다고 저는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 썼습니다. 그렇다면 목숨 자체란 뭐였을까요? 죽어 가던 제 마음에 왜 제가 더듬어 온 그때까지의 과거 정경이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선명하게 비쳤던 걸까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요? 저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는 이 방을 향해 복도를 걸어오는 유카코의 발소리를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시원한 미풍을 맞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손목 시계를 보니 3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방의 불을 껐습니다. 너무 어두워서 도코노마 위에 설치된 조그만 형광등을 켰습니다. 카운터를 호출하는 초록색 전화기가 도코노마 끝에 있었습니다. 유카코는 그곳에 쓰러져 죽었고 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죽어 가던 유카코에게는 어떤 과거의 영상이 비쳤을까요? 그리고 죽어 있는 자신을 어떤 목숨이 되어 보고 있었을까요? 저는 그 신기한 사건이 저에게만 일어난 우발적인 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카코 역시 같은 현상 속을 떠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각자가 한 행위를 보고 각자의 삶에 의한 고뇌와 안온을 이어받고, 그것만은 소실되지 않는 목숨이 되어 우주라는 끝없는 공간, 시작도 끝도 없는 시공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아닐까? 저는 어둠 속에서 그곳만 창백한 빛이 비치고 있는 도코노마에 눈을 주고 유카타를 입은 유카코가 엎드려 죽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 망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망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누가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인생에는 틀림없이 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P230-232)     

저는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기요타카가 쓴 '미라이'라는 글자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 통의 편지로 거의 과거의 일만 이야기해 왔습니다. 두 사람의 편지를 비교하면 제가 더 과거에 대해 쓴 횟수가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보다 당신이 좀 더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10년 전의 그 사건으로부터 차례차례 파생되어 온 지금까지의 일에 홀린 듯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란 무엇일까요? 저는 요즘 저의 '지금'은 저의 과거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고 확실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발견은 아닙니다만, 그런 것은 당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특별히 내세워 생각해 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뭔가 새로운 대발견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과거는 틀림없이 저에게 현재를 가져다주는 작용을 했겠지요. 그렇다면 '미라이'(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의 과거에 의해 이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정해지고 만 걸까요? 이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요타카가 그걸 저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요타카를 보고 있으면 저는 용기를 얻습니다. 낙담하여 실의에 빨질 때도 있습니다만, 생각을 고쳐먹고 분발해 나가면 다시 맹령히 투지가 솟아납니다. (P241~242)     


왜냐하면 당신은 과거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금'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시시각각 변해 가는 신기한 동물이지." 아버지의 말대로입니다. '지금' 당신의 생활 방식이 미래의 당신을 다시 크게 바꾸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과거는 살아 있어 오늘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이 끼어 있다는 것을 저도, 당신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P245)    

 

네거리에 서서 자,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여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고 어쩐지 공장가를 헤매게 되어 미용실 같은 건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당한 거리를 와 버렸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공장이 길게 이어진 길을 바보처럼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스로 동네다운 곳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저물고 게다가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가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녹초가 된 상태로 미용실 한 곳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귀가한 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네거리에 와서 에잇, 이쪽이다, 하고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신흥 주택이 늘어선 곳이 나와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미용실을 발견하고 간단히 계약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꼭 인생이구나, 하며 묘하게 감탄하면서 저는 매일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P253)     


아마 이 편지는 제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요. 저는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미용실 간판을 찾아 다음 목표 지역인 네야가와 시의 모든 길을 터벅터벅 계속 걸을 것입니다. (P262)   

  

저는 이 우주에서,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우주에서 당신과 레이코 씨가 앞으로도 쭉 행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P278)   

  

사랑은 환상이다. 모르는 게 많아야 환상은 유지된다. 현실이 개입하면 환상은 힘을 잃고 사랑은 희미해진다. 그러므로 서로 알아 가는 과정, 곧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사랑을 잃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면 그를 알고 싶어진다. 모르면 내 세계 안에 그를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알아 간다는 것은 내 세계 안에 그의 좌표를 그려 넣는 일이다. 불안하지 않으려면 그를 내 세계 안의 어떤 좌표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안심할 수 있으나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멀어진다. 즉, 알아 간다는 것은 그의 공백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인데, 다 채워지면 안정된 관계는 유지되지만 낭만적 사랑은 떠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안다는 것과 사랑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는 편안함과 안정된 기억이 남는다. 이제 그 기억만으로 살아가야 한다. (P27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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