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빛]
“안에 훤히 비추는 빛이 들어올 수 있게 열려 있고 통로가 긴 지하 동굴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보자.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오직 앞만 보도록 다리와 목이 묶여 있고 몸이 고정되어 있어서 고개를 돌릴 수 없다....”
-플라톤, <국가론>-
집을 짓고 살기 오래전 인간은 동굴에서 생활해 왔었다. 동굴의 어둠은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한 곳이다. 삶은 어둠에서 태어나 죽음이라는 어둠으로 돌아간다. 태초에 빛이 있기 전에 어둠은 존재했다. 알타미라(Altamira) 동굴에 그려진 그림들(image)은 사람들의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사물을 본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상상속의 동물들인 셈이다. 관념은 플라톤이 동굴에서 보았던 것이고, 그는 그것을 이데아(idea)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둠은 모든 생각과 감각을 느끼게 한다. 옆 사람의 숨소리까지도, 그리고 모든 촉각적인 것들이 살아난다. 그러나 동굴을 나서는 순간 인간은 그 기능들을 잃어버렸다. 귓가에 맴도는 벌레 소리도, 눅눅해진 벽의 냄새도, 어두워서 만지던 손의 느낌도, 오로지 시각적인 것에 의해서만 모든 사물을 판단하게 되었다. 시각적인 것은 부정확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겉보기와는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군다나 밝을 때는 안다고 여겨지고, 어두우면 모른다고 치부해 버린다. 빛이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곳으로 이끌려 가다보면 정작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J라고 불리우는 그녀는 야맹증(Night blindness)이다. 밤에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니, 이동을 할려면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가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극장을 한 번도 혼자 가보지 못했다. 극장의 암전이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밝은 곳이든, 어두운 곳이든 눈은 적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적응하지 못했다. 어두운 계단을 걷는 것은 특히나 위험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적응하지 못하는 눈은 그녀의 활동에서도 제약이 되었고, 사회생활에서도 정상적이지 못했다. “얼마나 안 보이는 거야?” “밤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 그녀는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 쥐어 보이며 말한다. “망원경처럼 두 눈에 갖다 대면 가운데 밝은 부분은 보이지만, 주변부가 다 컴컴하니 안 보인다고 보면 돼. 그 정도의 보이는 구멍이 엄청 작거든.” 망막질환은 시각정보를 신경신호로 바꾸는 망막 내 세포(막대세포, 원뿔세포, 망막색소상피세포) 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명암이 있어야 우리 눈은 사물과 공간을 인지할 수 있다. 사진 또한 명암의 차가 없다면 초점을 맞추기 어렵다. 밝음과 어둠이 적절히 있어야 한다. 시각적 불편함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공교롭게도 사진을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암실작업은 쉽지 않았고, 주로 낮에만 촬영했었다. 밤 야경촬영은 그녀에게 무리였기 때문이다.
“불편해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
“나만 불편한 건 아니지 않나, 베토벤도 청각을 잃어도 작곡했고, 색맹이라도 그림을 그릴수 있듯이,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사진도 낮에 찍을 수 있으니 말이야.”
“누구나 조금씩은 그런 불편을 감내하긴 하지.”
“카와이 나츠키의 소설 <태양의 노래>에 나오는 여주인공 아마네 카오루는 XP(xeroderma pigmentosum, 색소피부건조증)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어. 그녀는 염색체 열성 유전병으로 햇빛이 비치는 낮에는 나갈수가 없지. 그래서 밤에만 활동해. 그렇지만 나는 낮에 활동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이렇게 사진도 찍고 말이야. 단지 브랏사이(Brassai)처럼 파리의 밤거리는 촬영이 어렵지만 낮에 촬영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지.”
“누구나 장애를 조금씩 가지고 살아가잖아. 나도 절반은 밝은 곳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밝은 방에서만 생활하였다.
사진은 어둠에서 출발했다. 사진이 발명은 캄캄한 상자에 빛이 투과되는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방)에서 기원했다. 바늘구멍처럼 작은 구멍을 뚫기만 하면 되는 카메라 옵스큐라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렌즈, 반사거울 혹은 반투명 거울을 통해 상을 재현한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카메라의 바디(body)라면, 카메라 루시다는 렌즈(lens)인 셈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1807년 윌리엄 울러스턴(William Wollaston)이 디자인했다. 빛과 어둠은 사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사진은 그 대상물의 ‘발산’을 빛이라는 물질에 의해 나와 연결시켜 준다. 사진이 또는 이미지가 내게 연결된 순간, 그 순간이 푼크툼(punctum)이다. 사진은 대상과 그 이미지와의 ‘관계맺기’인 것이다.
그녀의 ‘관계맺기’는 철저히 밝은 곳에서만 이루어졌다. 어두운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다는 것의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가 인식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만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빛과 어둠. 그 둘의 명암의 차이에서 생기는 보임이 그가 세계를 보는 인식의 전부이다. 자신의 욕망, 희망, 고정관념, 개념들은 모두 보이는 것들로 유추하게 된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에서 예술은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으로 가려하지만,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너머의 세계는 단지 어둠일 뿐이다. 사진은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을 찍을 수 있을까? 사진의 은입자에 반응을 해, 기록이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것이 냄새이든, 소리이든 사진에 담겨져 있다고 항변할 뿐이다. 하지만 사진은 야맹증인 그녀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빛이 만들어낸 기록일 뿐이라고.
“언어는 근본적으로 관념적이야. 아무리 묘사를 잘 한다고 해도, 그건 관념일 뿐이지. 사진은 관념을 근본적으로 찍는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 사진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것이야.”
“현실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 만일까. 그렇지 않지 않나?”
“어두운 동굴에서 나온 인간은 어둠이 만들어낸 상상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에선 지극히 현실적이지.”
“우리의 모든 감정들은 얼굴에 다 표현되잖아.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기쁘면 미소를 짓잖아. 사진은 이런 표정들을 담고. 단지 사진은 그들이 관념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야. 단지 표정을 기록하는 것이지.”
“종교나 철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말들 하고 있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은 상상일 뿐이야.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나?”
“존재하지도 않는 것,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해. 사진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찍을 수 없어.”
“언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설명하느라,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지. 하지만 그 단어들, 새로운 개념, 관념들은, 숲속에 나무들이 떨어뜨렸던 나뭇잎들이 켜켜이 쌓인 흔적에 하나 일뿐이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다 본성의 그림자야, 보이는 현실 세계의 그림과 보이지 않는 상상 세계의 그림, 이 모든 그림자가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있어.”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밝은 빛이 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항상 완벽을 추구한다.
하지만 가장 본받아야 할 인생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 마다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일어서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해결책은 있게 마련이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밝은 빛이 비친다.”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