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선(線)]
“정신적인 우월을 지탱하려면 물질적인 상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결여되면 정신적인 우월은 당연히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사르트르, 에로스트라트-
우리의 세계는 0과 1의 컴퓨터의 세계이다. 0은 양수이고 1은 음수이다. 또한 0은 없음이고, 1은 있음이다. 흰 종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0이고, 종이에 점하나를 찍으면 1이다. 이것들을 이으면 선(線)이 된다. 다시 선을 이으면 면(面)이 된다. 칸딘스키가 미술의 기본 요소를 “점선면<Point and Line to Plane>”(1926)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진 또한 그렇다. 서예학원에서 처음 붓에 점을 찍고 선긋기 연습을 하게 된다. 기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선긋기를 하게 된다. 일정하게 수평을 맞추어 선긋기를 하는 것과 같이, 사진 또한 수직선과 수평선의 이해에서 시작된다. 프레임안에 수평을 맞추는 것은 가장 안정된 구도로 촬영하기 위함이다. 물방울 수평계(Bublle Level)이나 화면 그리드(Grid) 뷰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수평이 맞지 않으면 보는 이에게 불안한 요소를 주기 때문이다. 가장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진의 출발인 것이다. 물론 사진 프레임을 일부러 기울여 촬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점(dot)과 점을 이은 교점(交點, node)들은 선을 이루는 요소이다. 네트워크는 이러한 점들로 연결되어 있다. 점들 사이의 관계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하는 선들은 이미지의 부분들 사이에서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빛이라는 은입자(光子)는 직진을 함으로써 직선을 만들기도 하고, 파동을 그리며 곡선을 만들기도 한다. 빛은 매질(媒質)에 따라서 그 반사와 굴절현상을 가진다. 서로 다른 매질을 통과할 때 발생한다. 보이지 않는 빛은 프레임안에서 무수히 많은 선긋기를 한다. 가상선(Imaginary Line)들은 사진가의 눈에만 보인다. 프레임의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평의 선들과 수직의 선들이 교차한다. 실제로 우리는 도심에서 많은 선들은 보았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들, 바닥에 교통신호체계에 의한 횡단보도 선들, 차선들, 선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규칙을, 또는 무질서한 선들을 통해서 정리되지 못하는 마음의 불안들, 이러한 선들이 우리의 눈에 보인다. 어렸을 때 글씨를 삐뚤빼뚤 쓰는 것을 고치기 위해, 서예학원을 다니거나, 펜글씨 학원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줄이 쳐 져 있는 공책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선지 음악 공책처럼,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을 썰 듯, 줄이 쳐 진 공책에 글씨를 또박또박 정자로 쓰는 버릇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어느 날 정독 도서관에 책하나 빌릴까 하고 간 적이 있었다. 도서관의 예술 책 코너의 책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중앙에 놓여 있는 큰 테이블에 머리카락은 허옇게 세었고, 나이가 지긋한 한 할머니가 돋보기 안경을 쓴 채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뭘까 싶어 봤더니, 처음 영어 쓰기를 배울 때 사용하는 줄 쳐진 공책에 소설책의 내용을 쓰고 있었다. 언뜻 봐도 80세가 넘은 나이였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무슨 소설 책이에요?”
할머니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거,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을려고 하는 거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우.”
“와! 그 책 저도 읽었는데, 넘 어렵던데요, 뭔 말인지 잘 기억도 안나고요.”
“나도 한 번 읽으면 잘 모르지, 여러 번 읽으면 좀 달라, 이렇게 좋은 구절이 있으면 적어보는 거요, 그런데 요즘은 책의 글씨가 작아서 잘 안 보여 힘드네요” 할머니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30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했다고 했다.
중고 책방에 책을 보다보면 밑줄이 그어져 있는 책들을 보게 된다. 책을 읽었던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책에는 자신의 생각을 빈 여백에 적어놓은 책도 있다.
내 안에 밑줄을 그었다. 사진가는 그어진 줄 위에 서 있는 자이다. 경계선에 서 있다. 경계선은 포토라인이다. 삼풍백화점과 같은 대형 참사가 벌어진 곳에 취재는 사진가자들의 지나친 취재 욕심에 의해서 과열되기 마련이다. 현장은 기본적으로 안전선이 마련된다. 참사 현장에서 제일 근접된 라인은 119라인이다. 그 뒤로 폴리스라인, 그리고 포토라인은 그 뒤에 있다. 이 가상의 선들이 무너질 때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을 구하려는 소방관과, 참사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경찰관과, 기록을 하려는 기자들로 뒤섞이게 된다. 사진가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 주위를 돌아다닌다. 영화에서도 180도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가상선을 넘어서는 순간 시각의 일관성은 무너지고 공간 인식에 있어서 관객은 혼돈할 수밖에 없다. 기준이 되는 선을 넘는 순간 내편인지 네편인지 관점은 달라진다. 우리는 과연 어느 편인가? 내가 정한 기준에 대한 마지노선(Maginot Line)은 무엇인가?
세로선을 그은 뒤 왼쪽에는 마이너스(-)표시를 하고, 오른쪽에는 플러스(+)표시를 한다. 왼쪽은 좌파이고, 오른쪽은 우파이다. 한쪽 편은 비관론자인 홉스가 있고, 한쪽 편은 선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루소가 있다. 사실 이러한 선들은 나의 마음이 구분 짓는다. 그 선은 어느 순간 다시 그어지게 된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듯이 말이다. 태극기는 남과 북, 빨강과 파랑, 그 구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과 북이 동과 서가 서로 다른 이념과 갈등으로 선이 그어졌다. 논쟁은 삶에서도 수많은 선들을 긋는다. 각자가 가진 기준들이 그 선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립은 사실상 없을 수도 있다. 선택을 하는 순간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의 아고라(agora)는 수많은 선들을 만든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편의 이익과 내편의 진영논리에 의해 이야기하게 된다. 편향적이고, 왜곡된 시각은 서로에게 욕설과 비방이 난무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과연 집단지성의 논리이고, 기준선인지?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한계선인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태도에서 그 몫은 결국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선들에 달려 있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한 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입어야 할 상복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에 관해 모두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적자이지만 장자는 아니었고, 형 소현세자에 대해 이미 어머니가 큰아들에 대한 장례를 마쳤었다. 왕위를 계승받은 국왕이었으므로, 종법상 모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차자로 보고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가, 장자로 보고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된 것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3일장을 하는 것이 맞느냐 5일장으로 하는 것이 맞느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 영의정인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었고, 장자(長子)이든 차자(次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의 예를 따르려 한 반면 윤휴는 의례를 인용해 비록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참최복(3년상)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예송논쟁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것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배경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논쟁, 이기 1원론이냐 이기 2원론이라는 문제까지, 정치적인 노선의 문제였다.
광장의 한 켠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시민분향소 설치까지 경찰들과의 실랑이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분향소는 설치되었고, 영정 사진과 분향을 할 수 있는 향로와 국화꽃들이 준비되었다. 시민분향소에는 밤새 추모객들이 발길이 이어졌고 애도의 메시지도 남겨졌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광장으로 거리로 나온 분향소들을 보게 된다. 히치콕의 영화 <이창>의 주인공인 제프리스와 같이, 사진가는 사실 관음증과도 같은 응시로 사람들을 관찰한다. 빌딩의 창문을 통해서 보든, 건물의 옥상(rooftop)에서든 내려다본다. 마치 자신은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인마냥, 전지적 작가 시점인 마냥 보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태도를 통해서 그들이 어떠어떠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확신한다. ‘저 사람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는 저렇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잖아. 그러나 저 사람은 단지 의무감에 온 듯 하고, 저 사람은 자신의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온 사람 같기도 하고’, 그들의 정체(正體)는 사실 사진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한 여성이 추모객으로 왔지만 그녀는 추모보다는 유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왜 유가족을 찾고 있을까? 복장이나 차림새로 보아서는 나이가 든 사람은 아니다. 젊은 취향의 옷차림이다. 더군다나 약간 레깅스(leggings)와 같은 몸에 딱 달라붙는 하의에, 짧은 민소매 차림이었다. 장례식장에 온 옷차림은 더구나 아니었다. 각자의 옷차림을 이러쿵저러쿵 논하기에는 시민 분향소에 들른 추모객들의 패션을 이야기하기는 뭐하다.
“아니, 장례식장에 왔으면 검은 옷은 아니더라도 차분한 옷차림을 해야 되는 거 아냐?”
“요즘 누가 옷차림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냐, 꼰데들이나 옷차림에 신경쓰지.”
“아무리 그래도, 옷차림이 야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시선도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닌가? 정도를 벗어나면 그건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생각을 하기는 그렇지만, 자신이 옷차림이 어떤지 생각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긴 그렇긴 한데, 사실 상식선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상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어.”
“조선시대 효종의 죽음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으니 그 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지금의 옷차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나 다를 게 하나 없는 것 같아.”
“어쨌든 상식이라는 것이, 옷에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상식적이라는 것이 꼭 정상적이라는 것인가?”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
“현실적이지 않은 일들이 현실에는 많이 벌어지고, 비현실적인 것들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여.”
“사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야. 앗제의 사진을 보면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다큐멘터리이거든.”
“사실과 허구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어떤 가상선을 벗어나면 그게 바로 허구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