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 전에 누나를 만났다.
이번 만큼은 왠지 명절에 걸 맞게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나서 밥도 먹고 근황 얘기도 하고 명절 잘 보내라고 덕담도 하면 가족들에게 뭔가 해야 할 도리를 다 한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죽을 운명에라도 처한 것인가 갑자기 안하던 짓을?
만나는 참에 사주를 보잔다.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집이 있다고 했다. 사실 아주 가까운 혈육중에 그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이 있지만 단 한번도 나에 대해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도 했고 극 현실주의였던 나로선 탐탁치 않은 제안이었지만 수락해야만 했다. 이번 만큼은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이 집안 남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좁은 방 안에 다닥다닥 붙어서 줄 지어 앉아있는 무리들의 끝에 앉아서 속삭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근황은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서 주고 받았으면 될 터인데 기다림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야 만 것이다. 목청도 커서 시선을 잡아먹는 두 남매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차례를 기다렸다.
"여자를 뭐 하러 만나. 이용만 당하다가 끝날 팔자인데 그냥 혼자 사는게 나아. 정 외로우면 연애나 간간히 하면서. 혼자 살아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게?"
돈, 건강, 사랑 이 인간으로 살면서 가장 큰 화두이니 물었고 앞의 두개는 그럭저럭 수긍이 갔으나 연애운이 기가 막혔다. 비록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 했을 지언정 사랑에 대한 갈급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강한 사람인데 연애를 하지 말라니..이보시오 점쟁이 양반. 아니라고 말해주오...제발..
말인즉슨, 결혼 적령기를 지났고 나는 돈을 벌어도 여기저기 퍼줄 팔자라 앞으로도 큰 돈은 못 모을 거란다. 그러니 당연히 여자를 만나도 한 번 다녀왔거나 애 딸린 여자를 만나게 될 텐데 그네들이 내게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을 가지고 만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부추겨서 돈이나 벌어다 주게 만들어서 평생 등골이나 빼먹고 살 궁리만 할 여자들이 꼬일 거란다.
숨이 터어~억 하고 막혀왔다.
실제로 겪어봤던 상황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사랑이면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전 세계에 나를 알고 있던 모두가 팔 벌리고 가로막아 이루지 못했던 만남이다. 이보시오 지인양반들 어쩌겠나. 앞으로도 계속 그런 여자를 만난다고 하니 당신들은 앞으로도 내 쪽으로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감시해야 할 팔자가 되었구려 ㅎㅎ 어디 한 번 잘 해보시구려. 콩깍지가 씌인 나는 상당히 매섭소이다! 하핫!
어차피 남자는 평생동안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종자가 아니던가. 진심이든 아니든 나를 아껴주는 말, 위하는 행동이라고 내가 느낄 수 있다면 거짓이면 어떠한가 말이다. 내가 죽을때까지 사랑이라 믿으면 그만 아닌가. 따뜻했으면 된 거 아닌가 말이다. 나는 얼마든지 칙칙하고 냄새나는 늪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 양지 바르고 단단하게 다져진 비옥한 땅이 아닌데 어찌 끝까지 안온하기만 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단 말인지..세상은 진창이고 어차피 무릎까지 빠진 인생을 아둥바둥 앞으로 나아가며 버티고 있는 것이라면 까짓거 두어명쯤 더 어깨위로 얹고서 간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다고. 오히려 좋겠네. 외로울 틈은 없을거 아냐.
호구 잡히면 어때. 정순한 사랑이 아니면 어때.
이 외로운 인생을 함께 간다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정말 온 우주가 혀를 차는 호구이니 그대 걱정하지 말지어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