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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Feb 16. 2024

마침내 한 걸음, 내 딛다.

머리속에 온갖 잡념들이 찌그러진 대양에 한 웅큼 모여있는 미꾸라지 처럼 어지러이 싸돌아다닌다. 


 운전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자려고 누울 때도, 샤워를 하려고 할 때도 망상과 걱정이 혼재돼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달고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는데도 기억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걸 보면 인간의 뇌라는 것도 결국 사용하면 할 수록 효율이 떨어지는 건지 잡생각으로 너무 과열돼 있다 보니 정작 기억돼 있어야 할 것들이 지워져 버렸는지도. 


 즐거운 기억과 생각들은 금방 그 효력이 다 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은 아스콘 처럼 끈적하고 퀘퀘하게 남아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면 술을 마셔야 하고 술을 마시면 또 바보가 되거나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주륵 하고 흐르는게 여자가 된 듯도 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속이 와글와글 하다. 


지쳤다. 


 전날 마신 술이 채 깨기도 전에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지만 기다려왔던 결심. 수 없이 많은 다짐을 했지만 실행에 옮겨지는 프로세스가 부족한 나약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내가 뜬금없이, 무작정, 불현듯 걸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건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적색신호 같은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적당히 선선하고 적당히 맑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저 혼자 걷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새롭고 신선했다. 나는 늘 보던 사람들과 늘 다른 곳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풍경 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저 평범하게 세상 속을 거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뭔가 나와는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괜히 껄끄럽고 어색한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저 걷기로 한다. 하늘을 이고 바닥을 보며 터덜터덜 걸었다. 


 걷는 행위 자체가 힘든 일은 아니기에 머리는 또 다시 회로를 가동한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되고 이내 잡념과 망상의 바다에 풍덩! 하고 빠질 뻔 했으나 쉭쉭 머리를 두어번 휘저어주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냥 넋을 놓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 보다가 주변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이제 곧 포근한 봄바람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 나무들은 알까. 추웠던 지난 겨울을 꿋꿋히 버텨온 보람을 느끼고 있을까. 얘들도 나만큼 치열하게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까. 슬픈 날도 있을까..좋겠구나 이제 곧 봄이다. 너희들은 또 한번의 겨울을 이겨냈구나. 좋겠다. 장하다. 

 

 또 다시 빠져드는 상념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걸었다. 양 팔을 앞뒤로 흔드는 것에 집중해 본다. 오른발 왼발이 자연스레 뻗어지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귀로 흘러 들어오는 가사 없는 첼로음악에 귀를 귀울여 본다. 사각사각 패딩이 맞부딪혀 비벼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춰본다. 앞을 한번 보고 하늘 한번 보고 좌우도 둘러보고 스쳐지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하시는 어르신들께 곁을 내어 드리고.


그저 걸었다. 30분을 걷고 한시간을 걷고 두시간을 걸었다. 


그저 앞으로 걸으며 어떤 기대도, 예상도 없이 내 걸음걸이와 내 딛는 곳마다 피어나는 풍경에 집중해 보려고 노력했다. 온전히 생각을 멈추고 걸음에 몰입되기를 희망했고 잠깐잠깐 다른길로 빠지기는 했지만 나름 만족스럽고 그래서 데워진 몸과는 다르게 머리속이 어느정도 차분하게 정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정도면 성공적인 산책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다짐해 보았다. 큰 결심도 아니고 새해의 바램도 아니며 소망도 목표도 아니다. 그저 가끔 이렇게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너무 의욕이 넘치면 금방 지쳐서 또 등을 돌리고야 말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짧지 않았던 인생. 숱하게 걸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날이었음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이 같은 적막한 시간이 계속 되기를 소망하며.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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