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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정 Apr 18. 2024

소질이 없어도 해보고 싶어

단편애니메이션을 완성하고 사실은 두 번 다신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혼자 5분짜리 애니메이션을 처음 만들어보면서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d 애니메이션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냐가 아니라 인물이나 사물을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상상하는 능력이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너무 공감한다. 왜냐면 내가 이것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형태의 캐릭터는 그렇다 쳐도, 카메라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공간도 입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건 진짜 미칠 것 같았다. 꼭 그 신을 다 완성하고 나서 20번 정도 보고 나면, 아 이 컷은 아래에서 캐릭터를 클로즈업하고 뒷 배경은 더 멀리 있는 것 같은 구도로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런 생각이 들어도 작업할 때는 절대적으로 모른척한다. 왜냐면 그동안 해왔던 반복작업을 다시 할 엄두가 안 나서였다. 새로운 구도에서 다시 동작을 다 그리고, 클린업하고, 채색한다고....? 그거 내가 다 해야 하는데... 못해... 절대 못해...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동안 이런저런 시도보다는 타협하고 포기했던 기억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 다시 보면 참 아쉽고, 그 아쉬움을 관객이나 지인에게 들켰을 때(진짜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그러니 나는 더더욱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사실 첫 작품이니까 당연히 내 마음에 들 수도 없고, 오히려 너무 완벽해! 마음에 들어!라고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첫 작품이라도 "이걸 내가 계속 공부한다한들 나아지기는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수천 장으로 시간을 채울 자신이 없으니 한 장만 그릴래"라는 마음으로 돌아가서 평면작업을 준비했다. 그런데 내가 전혀 만족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동화도 잘 못하면서 자꾸만 그림 안에 인물을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꾸 한 장의 그림을 연속된 시간 속에서 상상하면서, 이 한 장이 내가 그린 인물의 최고의 순간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차기작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10-20초짜리 짧은 영상을 만들면서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을 공부해 보자고 타협을 봤다. 그게 바로 걷기 연습. 인터넷에 떠도는 레퍼런스들을 트레이싱하기도 하고, 그걸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 대입해 보면서 계속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질척거렸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시간이 쌓인다고 다시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전편보다 반드시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어서 은근하게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난 지금 기초부터 다시 공부를 하고 있어라는 핑계로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철저히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1년 반동안 그렇게 회피하면서 느낀 것은 하루에 600장 그리는 것보다 스토리 기획하고 콘티 그리는 게 더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몇십 장에서 몇백 장이 되는 동작을 하나하나 그리는 작업도 굉장히 힘들고 절망스럽지만(?), 초기 기획단계에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는 거에 비하면 차라리 그게 낫다. 진짜 시나리오 쓸 때는 어떤 날은 막 술술 풀려서 3장씩 썼다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부 지워버린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괴감에 휩싸여 역시 오리지널 각본을 쓸 감독은 못되니 실력을 키워 스텝이 되자는 결론으로 스스로에게 포기를 종용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포기가 안된다.

사람은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이 진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잘 해낼 확신이 너무 부족한데, 그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앞으로의 비전, 전망, 미래 이딴 건 다 모르겠고 그냥 아직은 미련 없이 돌아서기에는 마음껏 해보지 못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렸을 때 스케치북에 그렸던 그림이 칭찬을 받은 것이 너무 좋아서 미술을 시작했던 것처럼, 나는 소질이 있어야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잘해야 계속하고 싶고, 잘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그래야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으니까. 근데 그건 직업으로서의 꿈이고, 어쩌면 소질이 없어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진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직업이 아니라 꿈으로 삼기로 했다. 나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금전적 보상과 커리어의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꿈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겨우 하나 어쩌다 얼떨결에 만들게 되었으면서, 다음 작품은 뭐 그렇게 나은 게 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첫 작품보다 더 별로인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완성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테니까.



돌이켜보면 "나는 못하니까 이건 안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차선책으로 결정했던 적이 지금 말고도 삶에 정말 많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중도하차했었다. 예를 들면 "나는 어차피 돈이 될 수 있는 생각은 못 하니까, 차라리 의미 있는 일을 할 거야"라던가, "나는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니까 고정된 학문을 공부해서 전문직이 되겠어" 등. 스스로를 한계지은 상태에서 결정한 일은 시작부터 할 맛이 안 난다. 무모한 자신감으로 시작해도 앞으로 뚫고가야할 좌절스러운 일이 한가득일 텐데, 애초부터 쭈그러든 상태에서 시작하니 끝맺지 못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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