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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설 Mar 30. 2024

자살생존자가 바라보는 세상

트라우마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안락한 의자에서 상담사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제게 참 소중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말이 있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지설님이 회복의 과정을 걸어갈 수 있는 큰 이유가 되었을지 몰라요.


여자친구는 자살로 세상을 떠나기 약 5개월 전, 대기업이었던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했기에, 신고를 결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회사는 얼마나 냉랭했는지,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녀가 어떻게 힘을 잃어갔는지, 저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가장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고통이 더 큰 사회문제의 일부임을 인지한 일부 비범한 생존자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남들을 위한 선물로 만들 때,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모색하기 위해 남들과 이어질 때, 트라우마의 의미는 바뀔 수 있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진실과 회복 』 中


그녀는 괴롭힘 당사자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받고, 약 3개월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녀의 죽음이 원인이 직장 내 괴롭힘 때문만 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요. 저는 비합리적인 신념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를 지키지 못한 내 책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녀가 직장 내 괴롭힘이 가장 심해졌을 때 썼던 메모를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그 괴롭힘 당사자를 긍휼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께 기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저는 평생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건, 누구보다 신을 사랑했기 때문이겠죠.


저는 그녀와 같은 계열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녀의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제가 퇴사를 결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가지고 있던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했으며, 회사는 그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고요.


기존에 저는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 징계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이미 사망한 이후였으며 유족에게 징계 결과를 전달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퍼진 소식을 듣고 유족에게 확인 전화를 드렸고, 안 좋은 예감은 당연히 맞았습니다. 유족은 어떠한 전화를 회사로부터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높은 확률로 아마 그녀의 회사는 그 일을 유야무야 덮었겠지요. 이미 충분히 힘겨운 시간을 지내고 계신 유족분들에게 언제든지 그 일을 문제 삼으실 수 있다는 의견 정도만 전달해 드렸고, 저는 퇴사를 했습니다.


그녀의 유족은 이미 그녀의 죽음만으로 충분히 힘겨웠습니다. 다시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기에,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알기에, 그 결정이 너무나 이해가 되었고 저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저는 이전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지요.


자살예방의 거장 로리 오코너는 자살은 '사회를 향한 기소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글이 사회에 변화를 주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글을 남깁니다.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비록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이들을 되찾을 수는 없을지만, 아직 남은 이들에게 연민과 위로를 전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자살생존자에게, 그리고 자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이 안녕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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