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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찔레꽃 Feb 25. 2024

포기했다

'장미의 이름' 리커버판 표지. 매력적인 역사 추리소설로, 한때 나도 저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포기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장미의 이름'은 서양사 교수들이 추천하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에코 자신이 중세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인 데다 그 전문적인 지식을 가장 대중적 장르 문학인 추리에 접목시켰기에 학생들이 흥미진진하게 중세사를 공부할 수 있는 도서가 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이후 이 작품을 본뜬  팩션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나, 아직은 이를 넘어선 작품이 없는 듯하다(한 때 '다빈치 코드'가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으나 역시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던 듯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읽어 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추리 소설임에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나만 그런지도 모른다). 현학적인 지식의 나열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 이렇게 되면 저버릴 만도 한데 이상하게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 다가가기 어려울수록 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도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내력일 터이다. '장미의 이름' 초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리커버판(사진)을 또 구매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황당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장미의 이름'과 같은 역사 추리소설을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한대(漢代)에 복원된 경서로, 뒤늦게 공자의 집에서 발견된 서경과 내용이 불일치되어 그 시비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던 경전이다. 그 시비를 둘러싼 내용들에 얼마간의 상상을 덧보탠다면 재미있는(?) 역사 추리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내와 주변 지인에게 내게 이런 '꺼리'가 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오늘 나의 아홉 번째 책으로 준비한 '수험생을 위한 서경' 편집을 마치면서, 그 꿈을 접었다. 고문 서경이든 금문 서경이든 아무리 내용의 편차가 있어도 그 기본 이념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천명' 사상으로 신비적인 요소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비적인 요소와 인본적인 요소의 상충점들이 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 틈이 안 보였던 것이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팩션의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건 거기에 함유된 신비적 요소 때문인데('장미의 이름'에도 요한계시록이 등장한다), 아쉽게도 '서경'에서는 그런 요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막연히 '금고문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논쟁에만 기대어 그야말로 황당한 꿈을 꾸었던 셈이다.


그러나, 혹, 모르겠다. '서경'을 좀 더 공부해 보면 뭔가 '꺼리'를 찾아낼는지도(원래는 신비적 내용이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인본적인 내용만 추렸다고 본다면 여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작용한 것이고 그것을 입증하는 작품을 쓴다면 꽤 괜찮은 역사 추리소설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텐데, 자료 수합이나 고증을 할 능력이 없고 보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꺼리'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역시  하와에게서 물려받은 '미련'이라는 유전 요인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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