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한 구절.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아침 식사 전 집뒤 텃밭에 음식물 쓰레기를 묻으려 땅을 팠다. 그런데 땅속에서 생각지 않은 고구마 두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큼지막한 것 하나와 작은 것 하나. 지난번 고구마를 캘 때 샅샅이 다 캤다고 생각했는데 놓쳤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난번에 잔뜩 캐서 쌓아둔 고구마들보다 지금 이 흙투성이 두 아이가 훨씬 더 귀하고 반가운 마음이 든 것. 허허, 도대체 이 무슨 마음인고? 문득 이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잃은 양 한 마리’ 같고 다른 아이들은 ‘아흔아홉 마리 양’처럼 느껴졌다. 놓친 소소한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이 이미 갖고 있는 큰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것 같다. 예수님도 어쩌면 이런 기쁨을 확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을지?
학교 다닐 때 빛나던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는 의외로 빛을 내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반대로 학교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사회에서는 큰 빛을 내는 경우가 있고. 교직에 있을 때, 생각은 늘 빛을 내지 못하던 학생들을 우선 챙겨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몸은 그 반대로 움직였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학교에서 빛을 못 내던 학생들이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미안함이 밀려온다. 뒤늦게나마 빛을 발해서 기쁘면서도 정작 교직에 있을 때 그들을 ‘길 잃은 양’으로 미리 찾지 못했던 목자의 무관심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안타깝고. 어쩌면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아도 나름의 균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학교에서 빛났으면 사회에서는 덜 빛나고, 학교에서 빛나지 못했으면 사회에서는 빛을 발하니 말이다. 우리 삶의 ‘빛나는 때와 장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늦가을에 우연히 만난 이 고구마들. ‘찾은 기쁨’이 커서 그냥 먹기가 아깝다. 며칠 더 감상하며 특별한 만남의 의미를 되새긴 후에 맛있게 먹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