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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Sep 26. 2023

사랑이 물들어

길을 걷다가 낯익은 이름이 적힌 간판 앞에 우두커니 선다.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이름 두 글자 "이화". 성은 모른다. 이름만 알뿐. 되새기다 보니 기억한다. 생각난다. 주는 사람은 잊어도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 고마움과 감사함이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30년이 훨씬 넘었으니까. 오늘처럼 조용히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이상하게 고마운 사람들이 더 생각이 난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고 마음이 따듯해지기 때문에. 그땐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냥 고마운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내가 그녀의 집 앞에 들어설 때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던 사람.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하던 사람. 그 작은 단칸 신혼방에 난 주말마다 초대받았다.


허름한 다세대 흙집 단칸방 벽에는 녹슨 대못에 옷가지가 주렁주렁 걸려있던 그 집. 나를 위해 주문했다며 떡집에서 방금 찾아온 말랑말랑한 반달떡.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자그마한 밥상 앞에 신혼방 부부와 내가 앉으면 방안은 꽉 찼다. 많은 손님이 들어오기엔 방이 너무 작았다. 작지만 방안 가득 인정과 사랑은 늘 넘쳤다. 그 집. 그 방. 그 가난한 부부를 보며 난 베풂과 감사함을 배웠다.


문득문득 보고 싶다.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뚜렷한 형체 없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녀가 무척 생각난다. 한없이 베풀어주던 그녀. 따듯한 그 사랑을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았다.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갈수록 그녀에게서 받은 감사함은 커지는데 그녀의 형체는 갈수록 희미해져만 간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


그녀가 살던 옛 집 주위를 둘러보면 그녀의 모습이 선명해질까? 그녀의 얼굴이 생각날까?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쯤 어떤 얼굴과 표정을 지녔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예전보다 더 인자하고 따듯한 얼굴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언젠가 우연히 우리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면 알아볼 수나 있을까. 혹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녀. 오랜 시간 수다를 떨면서 지나온 그녀의 삶의 흔적들을 들여다보고 싶다. 보고 있지 않고 함께 있지 않아도 항상 곁에 있는 듯 좋은 그녀가 많이 생각나는 하루다.


그리워진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되어준 관심으로 시작된 사랑이 좋았다. 누군가는 잊었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맙고 감사하게 받은 마음들이 때때로 생각난다. 받은 사랑은 받을 때 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감사함이 더 커져가는 것이 아닐지. 이제는 받은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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