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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May 23. 2024

엄마의 사람들

엄마가 원하는 액자가 있었다. 액자 하나만 봐도 하루가 심심하지 않을 그런 액자를 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가 나에게 준 첫 번째 숙제였다. 엄마는 나에게 크게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인데 아주 드물게 한 부탁이었다. 다행히 내가 해 낼 수 있는 숙제라 나도 기분 좋게 준비를 시작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친정에 갈 때마다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며 사진을 골라냈다. 액자가 걸릴 거실 벽면의 위치를 재고 인터넷으로 액자도 주문했다. 언제나 그렇듯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많이 담고 싶어 하면 부족함을 느끼는 법. 이번엔 액자의 길이와 폭이 담고 싶은 많은 양의 사진에 비해 너무 작다. 사진을 고르다 보니 크기와 연도에 따라 색바람의 정도가 가지각색이다. 욕심 같아선 더 많은 사진을 차곡차곡 쌓아서 담고 싶지만, 액자는 담는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붙여서 면을 채워야 하기에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서 배달된 빈 액자는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항상 일정한 온도 이하로 떨어져 온갖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가운뎃방에 임시 보관해 뒀다. 시간은 걸리지만 원하는 액자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액자로 말하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말을 감추고 마음속으로만 조급해할 엄마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다. 엄마에게 무언가 해 주려면 말 떨어지기 무섭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 속이 탄다. 생각한 것은 빨리 해 치워야 하는 성격이기에. 미루는 법이 없다. 나와는 정반대다. 평소 엄마는 나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재미 오래 사용할 수 있게 오늘도 난 게으름을 살짝 피워 본다.


액자를 최대한 엄마 마음에 들게 하려면 어떤 사진으로 채워야 할까? 고민이다. 우선 미리 골라 둔 사진을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펼쳐진 사진을 보고 난 그만 웃어 버렸다. 대부분의 사진 속에는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있다. 엄마의 속마음을 내가 냉큼 읽어버린 결과다. 그다음으로 많은 사진이 엄마와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즐겼던 지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된 사진 속 젊은 사람들의 여행사진, 사진 속 엄마는 함박웃음을 띠며 즐거워하고 있다. 엄마 모습이 참 젊다. 엄마의 젊은 날은 이렇게 차곡차곡 채워졌구나 싶다. 그 외에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오빠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동생과 부모님이 같이 찍은 사진 등으로 액자를 꽉 채웠다.


액자틀을 바닥에 놓고, 무엇을 싸고 동여매서 엄마집으로 들어왔는지 모를 큼직하고 노란 모란꽃이 있는 아기똥 같은 색을 지닌 보자기 하나를 찾아냈다. 보자기는 액자 속 사진을 받쳐줄 나무판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쓰일 예정이다. 보자기를 최대한 평평하게 잡아당겨 액자 틀에 붙였다. 하지만 붙이고 나니 색상이 이상하고 촌스럽다. 그렇지만 그대로 사용한다. 골라 둔 사진들도 보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크기가 각기 다르고 색상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굳이 굳이 사진 속 좋은 것을 찾아본다면 엄마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거.


사진 뒷 면에 유리테이프를 접어서 붙인 뒤 액자의 보자기 위에 하나 둘 사진을 올려 둔다. 꾹 누른다. 어찌어찌하여 붙이긴 붙였다. 붙이긴 했으나 아무리 봐도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사진 뒷배경이 된 노란 보자기 색상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차분한 느낌이 없고 산만하다. 붙여 둔 사진도 서로 돋보이려고 나서듯 경쟁이다. 이를 어째. 어쩌긴. 그냥 액자틀에 나무판, 그 위에 노란 보자기 그 위에 사진들, 사진이 꼼짝 못 하게 눌러줄 플라스틱 판을 덮고 고리로 고정. 액자 완성. 엄마가 원하는 액자 하나를 겨우 만들었다. 누군가 액자를 본다면 누구의 솜씨냐고 흉볼지도 모를 어설프지만 엄마에겐 좋은 액자.


엄마가 찍힌 사진 한 장 한 장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드물게 일터에서 벗어나 나들이 나간 엄마가 있다. 엄마가 품 넓은 나팔바지에 넓은 칼라의 셔츠를 입고 춤을 추는 듯하다. 신이 났다. 마당에서 늘어진 빨랫줄에 옷을 널며 쳐다보는 엄마의 얼굴도 있다. 엄마 옆에는 오래된 절구통이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돌담이 든든하게 서 있다. 맨발의 엄마도 있다. 하얀색 늘어진 반팔 티셔츠에 칠부 일바지를 입고 흙마당에서 몸을 갸우뚱하고 있다. 뒤로는 평상이 있고, 바람 부는 날인지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는 하얀 빨래가 바람에 흩날린다. 엄마의 앞쪽 꽃밭에서 고개를 살포시 내민 분홍빛 탐스런 장미들이 햇볕에 그을린 엄마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모든 것이 엄마를 향하고 엄마를 위해 준비된 듯하다. 사진들은 엄마의 삶을 엿보게 만든다. 예전 엄마는 항상 바빴다. 밥은 선채로 먹고, 발은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 많았다. 가족의 생계를 혼자 짊어지듯 여유 없이 열심히 살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의 엄마는 시간이 자꾸만 느리게 간다고 야단이지만.


하나의 액자 속에는 예전 아홉 식구가 살 던 시기처럼 보고 싶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고, 젊은 날 엄마를 있게 한 좋은 이웃들도 만날 수 있다. 그중, 보고 싶어도 영영 볼 수 없는 사람도, 일 년에 가끔 만나는 사람도 사진으로는 매일 만니니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것은 확대해서 크기가 커진 앳된 부모님의 흑백 결혼식 사진을 넣지 못해서 아쉽다. 엄마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 사진을 보며 젊은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오래된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만져가며 흔적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절대 끄지 않고 음향만 줄이는 사위가 사다 준 빨간 트로트 멜로디를 소리 조금 높여 틀어 놓고, 구부러진 허리를 짚고 사진을 응시하고 있을 엄마가 상상된다. 엄마는 이런 걸 좋아한다. 엄마가 갖고 싶어 했던 액자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장롱 앨범 속에 숨어있는 사진에서는 찾기 힘든 추억의 흔적들을 액자 속에서는 찾기 쉽다. 나이 든 엄마에게는 복잡한 것보다는 쉬워야 좋다는 결론이다. 밥 먹으러 식당방으로 들어갈 때 나올 때, 거실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테이블에 올린 채 참새들이 빨랫줄 위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도 갑자기 고개 돌려 혼잣말을 할 것이다. 액자 속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날씨 좋은 날 거기 가니까 좋냐?'라고.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지만 엄마는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아버지 이름을 간혹 부른다. 가족이 모였을 때, 맛있는 걸 먹을 때, 술자리가 있을 때, 심심할 때. 난 안다. 엄마의 눈높이에서 매일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엄마는 최근, 사진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마을 주민 한 사람에게 눈을 대며 "뭐가 좋아서 저렇게 춤을 출까? 지금은 치매가 걸려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쯧쯧"하며 치매 걸린 노인이 안타까운지 자꾸만 그 노인의 치매를 미워하고 있다.


예전엔 시골집 어딜 가나 나무 마루와 함께 그 집의 가족들을 볼 수 있었던 크나큰 액자. 세월이 흘러 집을 점점 새롭게 단장해 가면서 나무 마루와 함께 마루를 장식했던 액자도 많이 사라졌다. 미관을 해친다는 것도 그중 하나의 이유다. 난 인테리어 보다 엄마 집은 엄마가 마음에 드는 구조와 물건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엄마가 원하고 원했던 액자를 완성시켰다. 엄마에게 이 액자는 무궁무진한 시간을 함께 하며 만들어진 소중한 추억이면서 보물이다. 앞으로 사진 속 사람들은 엄마의 무료한 시간을 웃게 만드는 보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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