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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Aug 22. 2020

X, Y, Z가 무한대로 수렴한다면

세대 , 환경, 젠더, 노동 등등의 이야기

서울국제도서전 공모전에서 환경, 젠더, 세대, 노동의 주제 중 하나를 택해 적으랬다. 모든 주제를 한 번에 적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세대에 관해 적으면 된다. 내 눈으로 본 세상은 이랬다.

주제 도식화


민음사에서 한 주제를 잡아 가벼운 논문형식으로 풀어내는 책 『한편』을 기획했다. 그 책의 첫 주제가 세대였다. 그곳에는 10명의 저자가 있는데 몇 명만 꼽아 말하자면, 박동수는 「페미니즘 세대 선언」을, 김선기는「청년팔이의 시대」를, 정혜선은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를 적었다. 제목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세대라는 대주제 아래 젠더, 노동, 환경이라는 소주제를 잡아 말한다. 각 세대가 환경과 젠더와 노동과 등등의 문제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겪는다는 뜻으로 읽혔다.


수학 시간에 그리는 그래프가 생각난다. X축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쭈욱 그린다. 그럼 기준점이 생긴다. Y축을 기준점에서 위로 쭈욱 그린다. 그럼 2차원이 생긴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다시 기준점에서 깊숙한 어딘가로 선을 그린다. Z축의 탄생, 3차원의 생성이었다.

세대 그래프

각각의 문제들이 기준점에 선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가 기준점에 선다. X축은 30년간 지구에 살 사람으로 Y축은 45년, Z축은 60년을 더 살아야 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노동이 선다. X는 부장과 차장의 입장으로 Y는 사원과 대리의 입장으로, Z는 학생의 입장으로 바라본다. 젠더가 선다. X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입장으로 Y는 이론을 만드는 입장으로 Z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마치 이런 식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예시를 확신하지 못한다. 각각의 세대가 같은 의견을 가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x와 y와 z가 한 지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식이겠다.



각각이 뻗어온 길, 즉 경험이 다르다. 그 경험이 X세대와 Y세대와 Z세대를 결정짓는다. X세대는 다른 세대들보다 X세대에게 가장 큰 공감을 가지고 서로 논의한다. 당연한 말이다. 나는 Y세대다. 전광훈 목사의 코로나 관련 뉴스를 보며 아빠는 이런 말을 한다.

― 이번엔 전광훈 목사가 타깃이네.

― 이 시국에 시위를 한다는 데 그럼 정상이야?

나는 혀를 끌끌 찬다. 술자리에서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 현 정부 반대에 있는 집단들만 코로나 이슈로 뉴스에 나오는 것 같지 않아?

― 헉! 그런 듯…?

아빠는 기득권 잃기를 무서워한다. 그의 눈에 전광훈 목사는 공산주의의 길로 빠지고 있는 현 정부를 구원해주는 목사다. 친구는 억압을 무서워한다. 그의 눈에 전광훈 목사는 권력에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인데, 그 권력의 산하에 있을지도 모를 언론이 한꺼번에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같다. 전광훈 목사의 이슈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렇지만 나는 잃을 기득권은 없고 잃을 자유는 있다, 그래서 아빠의 말에는 짜증 냈고 친구의 말에는 공감했다. 이처럼 모든 세대는 환경/젠더/노동 등등에 관해 말할 때, X/Z/Y가 모두 같은 의견일지라도 그들 세대의 말에 더 끄덕이게 되도록 구성된 게 아닐까. 앞서 말한『한편』에서 고유경은 「세대, 기억의 공동체」라는 글을 적었다.


3차원의 지구 속에 동일값을 가진 점이 많이 찍힐수록 문제 해결은 쉬울 것이다. 원하는 바가 기득권이냐 자유냐 등등이냐 모두 달라도, 결과값이 같으면 추진력이 생기니까. 상상을 해본다. X축과 Y축과 Z축 각각이 무한대로 뻗어 가면 그곳에는 건강한 사회가 자리잡고 있을까? 아니면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좌 문제해결 그래프 우 무한대 수렴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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