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자등록을 했다.
피클을 팔겠다고 마음먹은 후에 가장 궁금한 것은 식품 패키지 뒤에 적혀있는 식품의 유형이라던가 영양정보, 원재료명, 품목보고번호 등은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 식품 제조업을 하려면 어떤 것을 갖춰야 하는지, 어디다가 신고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식품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이런 것들의 존재만 어렴풋이 알고 있지 유관 부서에서 완성된 최종 데이터만 받아 업무에 반영한 나는 어떤 과정을 통했는지 역시나 또 알 길이 없었다. 여성회관에서 연결해준 창업지원센터에서 이런 것들의 답을 얻지는 못했다. 신사업창업사관학교의 소개와 신청서 작성 시 유의사항을 듣고 신청서 서류를 만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업태를 알게 된 건 신사업창업사관학교에서였다. 나중에 자세한 내용을 적겠지만 신사업창업사관학교는 4주 동안 교육을 실시한 후 12주 동안 점포 체험을 한다. 이때는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측에서 제공하는 공간을 빌려 실제 제품 판매를 해보는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사업자등록이 필요했고 업태와 업종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업태는 식품제조업이 아니라 즉석판매제조가공업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클을 제조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형태기 때문이다. 중간 유통사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라면 식품제조업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는 식품업계에서 할 수 있는 최고 끝판왕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넘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에 궁금했던 식품의 영양정보(칼로리와 영양성분 표 등)나 원재료명에 적힌 원재료의 원산지와 배합 비율, 품목보고번호 같은 것을 식품제조업은 필수로 표기해야 하지만 즉석판매제조가공업은 의무 표기 대상이 아니었다.
또, 식품 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며 가장 답답하고 효율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던 식품 표기법. 식품 표기를 패키지에 적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폰트 규정이 있다. 폰트의 사이즈, 자간, 장평, 위치까지 규정이 있는데 이를 모두 지켜 표기하면 디자인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표기해야 할 것이 아주 많은데 패키지 사이즈까지 작은 제품의 경우 온통 제품 표기로 뒤덮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소비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명확하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디자이너에게는 너무 괴로운 법이었다. (심지어 매년 바뀐다! 돌아서면 바뀐다! 디자이너에게 점점 불리한 쪽으로!)
하지만! 이 식품표기법도 즉석판매제조가공업에는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앞서 이야기했던 나의 자아실현이 비로소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긋지긋했던 식품표기법에서 벗어나 내가 그릴 수 있는 모든 디자인을 온전히 다 그려낼 수 있는 환경이 드디어 만들어졌다.
자 이제 즉석판매제조가공업으로 등록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사업자 등록만 하면 된다.
여기서 또 별일 없이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겠지. 어쨌든 식품을 제조하는 일이라 준비해야 하는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사업창업사관학교는 사업개시일자를 정확하게 맞춰야 했기 때문에 우선은 간단하게 홈택스로 온라인 발급이 가능한 식품 소매업으로 등록하여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사업자 등록을 먼저 하고 진짜 사업자 등록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이상한 상황이 됐지만 2021년 4월 말 사업자 등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