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오페라 하우스
이틀 전,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을 보러 런던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다녀왔다. 나는 런던 외곽에 위치한 윈저에 살고 있다. 여왕이 생전에 거주하던 곳이라, 과거에는 왕실 가족과 마주치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던 지역이었다. 런던 근교에 거주하는 장점은 런던의 북적이는 거리가 그리울 때면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40대 후반의 한국 여성 세 명이 거주하고 있다. 영국인과 결혼한 두 커플과, 아이의 교육을 위해 안식년을 받아 영국에 온 한인 부부가 모여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신랑은 우리 그룹의 이름을 Korean Secret Society라고 붙였다. 한국어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집단 같다고 해서 KSS라 불린다. KSS의 봄맞이 투어로 투란도트 공연을 선택했다.
공연장 안은 2,000석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붉은 벨벳 의자와 100여 개의 미니 스탠드 조명이 주황빛을 뿜어내며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앙의 둥근 돔형 천장에는 금박 장식이 더해져, 중세 시대 백작 부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페라의 1, 2, 3막 전반은 남자 주인공 칼라프가 이끌어간다.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 오페라이기에 미리 내용을 숙지하고 가야 무대 위에 뜨는 영문 자막을 이해하며 극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왕자의 웅장한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을 듣다 보면 어느새 자막을 보는 것도 잊고 빠져들게 된다. 그의 높은 음역대의 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잡음이 사라지고 심지어 내 숨소리조차 방해가 될까 숨죽여 감상하게 되었다. 전설 속 사이렌의 남성 버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중국인일까? 일본인일까? 한국인이면 좋겠다. 1막 후, 일행들과 출연진 정보를 찾아보았다.
앗! 한국인이었다. 그것도 한 명 더 있었다. 칼라프 역의 테너는 백석종, 그리고 핑 역은 바리톤 유한성이었다. 투란나라의 장관들인 핑, 팡, 퐁은 항상 세트처럼 등장하기에 특정 배우를 찾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그가 핑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3막의 시작은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모두 등장한다. 드디어 아는 노래가 나왔다. 칼라프 백석종이 파바로티가 불러 우리에게도 친숙한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마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전석 매진된 런던의 심장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외국인의 귀를 사로잡은 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슬며시 애국심이 차올랐다. 괜히 옆 사람에게 "저 사람이 한국 사람이야. 너희가 감동한 칼라프, Nessun Dorma를 부르는 테너가 바로 한국인이라고!"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이 끝나기 전까지는 박수도 금물이다. 숨소리도 크게 들려 극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나눠서 쉬고 있었다.
유치한 국뽕이 차오르는 건, 어쩌면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세계 속의 한국을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일지도 모른다. 보이그룹 BTS, 감독 봉준호, 작가 한강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아졌지만, 우리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들이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영국인들에게는 그냥 자기 일 잘하는 동양인 일뿐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도 나는 스스로 한국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오지랖 넓은 아줌마 역할을 수행 중이다.
**투란도트는 중앙아시아 지역인 투란(Turan)과 딸을 의미하는 도트(dokht)를 합친 '투란의 딸'이란 뜻.
#투란도트#런던#로열오페라하우스#백석종#유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