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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몽블랑과 마주한 고요한 순간들

Mont Blanc 2024

by Eunju song Jan 19. 2025
에델바이스에델바이스

우리는 어제 내려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아침 산행을 시작했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 산길은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초보 운전자가 교통 체증을 일으키듯 나로 인해 산행 체증이 생겼다. 이런 민폐가 또 있을까 싶어, 간신히 피할 곳을 찾아 비켜섰다. 뒷사람들은  눈인사를 보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숲 속을 지날 때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Phytocide)의 청량함은 대용량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있는 듯했다.


앞사람의 뒷굽만 바라보며 오르던 구간과는 달리 안개 낀 평원이 보였다. 작은 산 하나를 넘은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과 안개로 인해 신성해 보이는 곳이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반지 원정대의 힘든 산행을 달래주었던 폭포, 숲, 빙하수가 어우러져 있는 엘프 마을인 리븐델(Rivendell) 같았다. 그때 안갯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영화에서는 요정들이 등장했지만, 현실에서는 방목된 검은 소떼들이었다. 낯선 존재의 접근을 감지한 소들이 작전 회의를 하려는 듯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걸을 때마다 소들의 목에 걸린 쟁그랑거리는 워낭 소리가 고요한 산속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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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대의 차가운 공기와 가뿐 숨소리가 만나 연기를 뿜어냈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가팔라졌다. 끝없이 좁은 길이 이어질 것만 같더니 갑자기 평원의 오솔길이 나타났다. 고원에서만  볼 수 있는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도 꽃말도 알 수 없는 들꽃들이 고산 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살고 있었다. 진귀한 식물들은 모양도 색도 제각 기였다. 화려함도 자랑도 없이 각자의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비교와 경쟁을 일삼는 나의 세상과 달리, 그들의 세상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존재했다.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듯한 경계선에서 인간 존재의 사소함과 삶의 겸손함을 가르쳐줬다.  몽블랑 속에서 자생하는 꽃들은 알프스를 더욱 알프스답게 만들어 주었다.   


배꼽시계는 언제나 정확했다. 식탁으로 쓸 평평한 돌 하나를 찾아 주위에 둘러앉았다. 산다람쥐 짐꾼의 가방에서 햇반과 컵라면을 꺼내 돌 위에 올려놓는다. 아침 식사로 나온 몇 조각의 바게트 빵과 버터도 조심스럽게 옆에 놓았다. 아침에 담아 온 보온병 속 뜨거운 물은 이미 미지근해졌지만 산행 중 최선을 찾을 순 없다. 풍경을 제외한 모든 것이 차선이다. 우리의 식사는 소박했지만 식사 장소는 해발 1800 미터 몽블랑 알프스. 갑자기 머리 뒤로 알프스 산의 공연이 펼쳐진다.  구름 속으로 솟아오른 산 봉우리들 사이에서 용 모양의 하얀 구름이 뿜어져 나왔다. 산속에 숨어 있다가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흰 용 같기도 하고 흰 호랑이 같기도 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 뒤 햇볕이 쨍하게 비치자, 산에서 뿜어져 나오던 하얀 구름이 잠깐 모습을 비추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후로 날이 너무 좋아서 다시는 그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없었다. 내리막의 끝자락쯤에 폭포처럼 보이는 물줄기가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쏟아져 내린다. 빙하수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해마다 증가한다는 안내표시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인간이 미안해’하며 빙하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빙하수를 만나면 세수를 하고 손과 어깨에 물을 적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사과 하나를 네 등분으로 나눠 먹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몽블랑 알프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순환적 여정은 반복된다. 산행 삼일차, 600미터를 올라갔다가 다시 500미터를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기 위해 내려가는 세상인지, 내려가고 싶어서 올라가는 세상인지.' 내리막 속 생각에 잠겼다. 나의 과거의 사회생활이 떠올랐다. 올라가는 데서 느꼈던 성취감과 내려오는데서 느꼈던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인생은 꽃이 듯,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산이 나를 때린다. 왜 나는 인생의 내리막을 두려워했던가? 오르막을 지나 내려가는 길이 더 가슴 벅차지 않은가. 바람에 실린 신선한 공기, 선명하게 들리는 시냇물 소리, 바위틈 사이에 피어 있는 들꽃들. 오르막 길에서 느끼지 못했던 오감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대자연을 만나는 이 순간이 인생의 가장 고요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주는 평온과 마주 걸을 수 있는 특별한 선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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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샬렛 라 그레인지(Chalet La Grange)는 오래된 헛간을 개조한 오두막 스타일의 스위스 쉼터였다. 오후 4시 햇볕이 부서진다. 먼저 도착한 다른 팀의 빨래가 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맥주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났다. 잔디가 깔린 곳을 맨발로 걸으며 발의 피로를 풀어본다. 공기가 차가워지는 걸 보니 해가 지나 보다.  쉼터 식사가 늘 입에 맞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쉼터는 스위스 가정식을 즐길 수 있었다. 뜨끈한 토마토 수프, 얇게 썬 감자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곁들인 스위스식 감자전 뢰스티(Rösti), 파마산 치즈가 올라간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달달한 디저트까지.  포만감에 오늘밤은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조용하고 아늑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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