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 Blanc 2024
숙소에서 조금 걸으니 알프스 산이 비치는 호수가 나타났다. 만년설에 덮인 알프스 산맥,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맑고 투명한 호수에 비친 주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호숫가에는 작은 샬레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고, 길가에 핀 야생화는 아침 이슬을 머금고 반짝였다. 둔덕 근처에서는 털을 고르는 백조들이 평화로운 풍경을 완성했다. 어릴 적 달력 속 스위스 모습이 눈앞에 실사판으로 펼쳐져 있었다.
부모님은 늘 여유롭지 않았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에게는 큰 꿈을 꾸기를 바랐다. 은행에서 받은 달력에는 독일의 아우토반, 스위스의 알프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세계적인 풍경들이 담겨 있었고 부모님은 그 달력을 거실에 걸어 두며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자 했다. 그렇게 자란 세 딸이 마침내 몽블랑에 모여서 그들이 꿈꿨던 풍경 속에서 함께 서 있었다. 오늘의 여정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나란히 동행하는 느낌의 길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길 양옆으로 펼쳐진 알프스 산맥은 어릴 적 달력 속 풍경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첫째는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고 둘째는 서른에 호주 유학을 준비하다 결혼을 선택했다. 셋째는 스물여섯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막내는 서른세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하나의 핏줄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살아가는 네 자매는 몽블랑에 피어난 들꽃들 같았다.
셋째 바람돌이 가이드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회계사다. 산을 잘 타는 그녀는 뭐든 완벽해 보였다. 어설프고 눈치 없고 모자라 보이는 막내 비타민이 항상 눈에 거슬렸다. 산행 중 길거리에서 등산 가방을 베개 삼아 대자로 누워있는 그녀를 보고 속이 터지기도 했다. 처음으로 앞선 무리를 제치고는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딴 듯 호들갑을 떠는 그녀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버스에 비친 막내의 모습은 버스 정류장 앞 노숙자 같았다. 분홍 슬리퍼는 가방 밖으로 반쯤 튀어나와 있었고 해를 가리려고 두른 수건은 히잡을 뒤집어쓴 무슬림 여인의 모습이었다.
“안 창피하니?”
“응”
“그래, 조금 귀여워”
“정말?”
“아니 취소!”
막내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바람돌이 가이드는 언제나 가이드라인이 확실했다.
둘째 산다람쥐는 한식과 전통음식 등 다양한 요리에 대한 자격증을 보유한 조리장이다. 현재는 서울 시내 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체력 소모가 많은 직업 덕분에 시작한 산행이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는 동생들을 잘 알고 있다. 가이드는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라는 것과 비타민은 겉은 물러터져 보이지만 속은 야무진 사람이라는 것을. 산다람쥐는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존재였다. 산행이 힘든 막내를 응원하고 피로해 보이는 가이드를 보살피며 모두가 함께할 수 있도록 돕는 그녀는 햇살 같은 존재였다.
이번 여행은 산다람쥐의 신랑을 위한 퇴직 여행이었다. 쉰일곱, 인생을 책으로 비유하면 새로운 책을 쓰기에는 늦었지만, 한 권을 마무리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세 자매는 책의 1부를 마무리하는 과정이라 생각했고 1부의 마지막 내용을 몽블랑으로 담아주고 싶었다. 약간의 위로와 응원을 담아 함께 했다. 그는 꽃을 찍는 걸 좋아했다. 몽블랑에서 찍은 들꽃 사진은 어머니 집 앞마당에 피던 꽃들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알프스 들꽃들을 하늘로 가신 꽃 같은 어머니께 보내는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찍는 듯했다.
샴펙스 락(Champex-Lac)은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수채화 같은 곳이었다. 만년설은 아침 햇살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고 저녁노을에서는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의 모습에 따라 바뀌는 만년설을 보며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가 한 생이라면 젊은 시절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노년기는 황금빛처럼 따스하고 은은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연 보석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인생은 황금빛으로 물들기 전 끝이 났다. 어머니는 황금빛 인생을 살고 계시는지 조만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산행의 피로가 서서히 누적될 즈음, 우리는 호텔 뒤 콜 드 페네트르 (Hôtel du Col de Fenêtre)에 도착했다. 높은 고도에 위치한 숙소 덕분에 정원의 테라스에서 알프스 산맥의 웅장한 산등성이를 감상하며 맥주 한잔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때로 우리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행운인지 깨닫지 못한다. 산행의 오아시스를 제공해 준 마을 사람들의 친절, 낯선 길에 안내자가 되어준 가이드, 몽블랑 여행을 기획한 빨래남, 오르막길에 손을 잡아 준 산다람쥐,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몰랐지만 자녀들이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기 꿈꾸었던 부모님의 오래된 소원.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