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섬이던 계절의 시작...
2025년 9월, 부산.
늦은 오후의 햇살이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오피스텔 창을 비스듬히 넘어 들어왔다. 익숙지 않은 바다 냄새와 갈매기 소리.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고요했다. 오래된 비닐을 뜯어내지 못한 박스들이 산처럼 쌓인 거실 한구석, 나는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 속 문자 메시지는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무미건조했다.
[OOO 부고 알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의 이름 석 자. 그 아래로 이어진 장례식장의 주소.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불과 한 달 전, 그 친구는 회식이라며 내게 전화를 걸어
"야, 너도 이제 50이다! 정신 차리고 좀 놀아!"
너털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뒤, 식당 골목길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친구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태준아, 너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이 새끼야. 인생 짧다!"
인생이 짧다!
정말 그랬다.
50년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고, 나는 지금 이 순간, 텅 빈 오피스텔에 홀로 앉아 있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듯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정확히 1년 9개월 전, 내 입에서 튀어나왔던 그 한마디로 거슬러 올라갔다.
2023년 12월, 서울.
평소와 다름없는 결혼기념일 저녁이었고, 우리는 모처럼 식탁에 앉아 와인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렇듯 적당히 농담을 던졌고, 선율은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응대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아니, 어쩌면 너무 평화로웠기에, 그 고요함 속에서 권태감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아내, 선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2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낸 익숙함. 그 익숙함은 때로는 편안함 이었지만, 때로는 묵직한 돌덩이처럼 나를 짓눌렀다.
“선율아.”
내 부름에 선율이 고개를 들었다. 늘 그래왔듯, 온화한 미소와 함께.
“응?”
나는 다시 와인을 홀짝였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짜릿함. 어쩌면 나는 이 짜릿함에 기대어 이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나는 결국 내뱉었다. 너무도 담담하게,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우리… 우진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각자 따로 살자.”
식탁 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찰랑이던 와인 잔 소리가 멈추고, 선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율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히지 않았다. 놀라움도, 슬픔도, 분노도. 마치 내가 이 말을 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짧고 명료했다.
예상치 못한 무덤덤함. 나는 그 순간, 내가 던진 폭탄이 불발된 건지, 아니면 그녀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20년 결혼 생활에 알 수 없는 균열이 시작되었다.
너무도 조용하고, 너무도 무덤덤하게. 그리고 나는 그 균열의 시작이, 나를 어떤 섬으로 이끌지, 그 날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