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 <폭력의 위상학>철학으로 다음 시대 희망하기
현실의 이야기를 쓰고 담다 보면 현재 사회가 도착한 문화를 만난다. 사회가 쓰는 언어와 소통 방식은 사람들이 나누어서 통용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화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색하고 있는 시기라고 보인다. 정확히 무엇이 원동력이고, 전환점이 무엇이었는지 원인과 배경을 한숨에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에 경쟁이 자연스러워지고 공동체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광고와 상품의 가치는 점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곳에 진정한 의미의 안전한 쉼터는 변형되어가는 중이다.
변화의 시대에는 새로운 기술과 지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모일 수 있는 바람직한 제도나 안전망이 있을 때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관련한 행위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이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고민할 수 있다. 생각과 방법이 다르다고 판단되는 상대를 만나면 대화로 통할 수 있다. 개개인들이 소망하는 바가 개개인에게 각자 이뤄지기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거부하고 싶은 주제에 속한다. 상속제든, 신분제든, 인류가 양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 적은 없었다는 믿음이 강하면 현상을 그대로 유지해 나가는 데 잡음이 생기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인물이나 기업이 대표로 뽑혀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의 체제는 특정 조건을 충족하거나, 기준을 넘고자 완벽한 노력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대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그 꼭짓점에 도달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탈감이 커지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빈민국 수준만큼 음식이나 안전한 집이 모자란 것은 아닌데도 내적으로 나눠가지는 문제에서 모두가 과열되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가 독특해 보이는 것이다. 십 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회 전반적으로 음식과 안전한 집 자체에 대한 걱정보다는 상대적으로 시장 가격적으로 하향세를 그릴 것 같은 자산규모가 안타까운 것이다.
정신과 마음이 온전한 사람이더라도, 시장 가격 대비 자산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스스로 제대로 일상을 보내지 않았다거나, 더욱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거나, 한 번에 만회할 수 있는 대안을 탐색하거나, 더 이상 들이부을 에너지가 없음에 한탄하기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현 체제를 조절하고 통제해보자는 목소리만큼 허무한 메아리가 없다는 것도 몸과 눈으로 몇십 년간 체험 중인 상태이다. 투자와 대출을 통해 확실한 자산을 확보하는 에너지가, 작은 자산으로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실현시키고자 하는 에너지보다 당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에너지의 친근함이 다를 뿐, 그럼에도 아주 죽을 만큼 음식과 잠자리와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덜 비싼 음식, 덜 비싼 집, 덜 버는 일자리라고 해서 음식이 아닌 건 아니고, 집이 아닌 건 아니고, 일이 아닌 건 아니다. 음식은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식사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집은 추위, 더위, 날씨, 외부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다. 일은 사회적 기능을 하는 목적이자 수단이다. 음식, 집, 일이 아무리 상품으로써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만연한 분위기라고 해도 상품 이전에 그 의미가 사라지거나 변하지는 않는다. 물론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격이 매겨진 상품으로써의 가치 또한 당연시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내는 것이 감당하기 부담되는 수준이라고 느낄 수는 있으나 먹고 마실 만한 음식이 풍족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법으로 준수되어 있고 민주적으로 평등함을 누리는 권리들이 여전히 곁을 지키는 중이다. 예전 사회에서 당연시되었던 차별들은 지금으로서 당연하지 않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차별들, 부당한 문제들 역시 누군가들의 희생과 덕으로 당연해지지 않을 날이 온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것에서 조금씩 나눈 시간과 돈과 마음으로 언젠가는 지금 괴롭다고 느껴지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문제와 갈등이 사람의 힘으로 천천히 개선되어 왔다는 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놓고 말해서 부가 축적되고 세습되도록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성적과 성과를 내는 것이 표준처럼 맞춰져 있는 사회이지만, 그 정답 같은 길도 늘 재밌고 짜릿하기만 한 경험은 아니다. 괴로움이 뒤따르는 체제인 것이다. 태어나는 신분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은 사회가 바뀌기 전에 일이었고, 삶을 선택적으로 개조해나가기 위해 더 많은 성과와 최적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뀐 사회의 모습이다. 이 사회의 모순은 성과와 최적화의 끝이나 종착지가 없다는 것이다. 결론이 없는 이야기는 회차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외부 시장과 관객이 원하면 완결을 맺지 않고, 추가적인 자원을 동원해 마무리가 없는 여정을 이어나가야 한다. 더 이상 가용할 에너지가 없는 이들은 내적인 마음까지 모두 가져와 끌어 쓰다가 소진되기 마련이다.
헤어짐이나 균열이 없는 여정의 다른 이름은 긍정이다. 아쉽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면서 나아가는 추진력에는 부정적인 것들을 태워나갈 자리는 만들어 놓지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통해 긍정성이 확대되는 만큼 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며 나아가고자 했는지, 시간과 장소에서 맺은 관계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무게는 줄어든다. 긍정은 부정과 함께 있어야 살아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정 없는 긍정이 양산되어 간다. 긍정은 갈 길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긍정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그 영향력이 배가 된다.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인데, 각자의 자아만이 환영받고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모두가 승자여야 하는 곳에선 함께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워진다. 서로를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빛을 발사하는 자아들이 되어 둥둥 떠다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더 좋은 모습이 되고자 성과를 만들고 부와 관련된 노력을 기울여도 괴로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체제의 모순 때문이다.
현재의 체제가 모순을 포함하더라도 강력함을 잃지 않는 건 위협할 수 있는 견제 체제가 일찌감치 몰락했기 때문이다. 옳음과 옳지 않음에서도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실험 결과는 힘과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외부에 적이 없는 체제는 내부적으로 곪아 터지지 않는 이상 일단은 그 수명을 유지하게 된다. 유일한 가능성은 개개인들이 괴로움이 버거움을 넘어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과부하되는 시점이다. 탈진된 인원이 대다수가 되었을 때는 체제를 움직일 힘을 상실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지금의 체제는 옳은 것, 정당한 것, 유일한 해법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 중심의 핵심사상은 처음부터 '자유'였다.
늘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불려지는 건 자유였다. 탈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보고 상상해볼 수 있는 것 역시 자유로운 생각이다. 지금의 체제 속에서 원했던 것을 충족하는 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결론 내리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가장 먼저 긍정이 지워버린 부정과 둥둥 떠다니는 자아가 내쫓은 함께할 공동체를 다시 찾아야 한다. 친근함과 우정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를 위해 곁에 지낼 수 있는 친구를 초대해야 한다. 자아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는 친구를 배척하고 스스로의 결핍을 참으면서까지 복수심만으로 사람을 사귀고 모이면 아무도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친구의 모든 다양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 않은 과제다. 그렇다고 겪어보지 않은 낯선 상대를 두려움과 파괴의 대상으로 보는 것 역시 함께 뭔가를 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데 썩 좋지는 않은 방법이다. 스스로를 완성시켜줄 수 있는 가까운 가족, 친구, 관계들로부터 충분히 마음과 정서를 나누고 함께 무엇을 겪어볼 시간이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삶에 주어진 남은 시간들을 자유로운 생각으로 바라본다. 어떤 가족, 친구, 사람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존중받을 수 있도록 행동할 것인지 되뇌고 받아들여 갈 수 있다. 이렇게 끝이 없어 보였던 계산된 미래는 조금씩 종착지와 끝을 발견하게 한다.
결핍과 부정을 품고 있는 자아도 분명한 기능과 목적이 있음을 환영할 때 관계와 공동체는 깊어진다. 마음과 정서를 표현하며 위기와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일과 문제 역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몸과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내는 것에서 체제의 모순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쉽고 빠르게 찾아오는 유혹과 욕망을 너무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순간을 통제하고 이겨내며 지킬 것은 지켜나가는 것으로 안전한 쉼터는 다시 지어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