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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12. 2022

좋아하는 것으로 충분해.

 재능처럼, 취향도 물려받는 것 같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전공한 엄마는 선후배, 동기로부터 연주회에 종종 초대받았다. 우리 가족은 독주회는 1층 왼쪽 자리를, 오케스트라는 2층 맨 앞자리를 선호했는데, 독주회 일 땐 무대의 왼편에 앉아야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크고, 오케스트라일 땐 높이 앉아야 뒤편에 위치한 팀파니와 심벌즈까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공무원 월급으로 욕심내어 어린 나의 키를 뛰어넘는 크기의 스피커를 가진 전축을 들여놓으셨다. 아침에는 ‘G 선상의 아리아’로 대표되는 현악 4중주가, 저녁에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Caruso’는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이탈리아어는 단 한 글자도 모르지만 지금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도 당연히 음악을 좋아했고,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창문이 달린 -옆에서 친구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연습실에 혼자 앉아 있는 게 무섭던, 한글도 모르던 시절부터 피아노를 쳤다.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방학이 되면 하루에 두, 세 시간씩 피아노를 쳐서 한의원으로 어깨와 손목에 침을 맞으러 다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력은 그저 그랬다. 엄마가 취향만 물려주시고, 재능은 물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손가락 길이도 함께… 체르니 30에서 40번으로, 소나티네에서 모차르트로, 그리고 바흐, 슈베르트, 베토벤을 연습할수록 한계를 느꼈다. 피아노를 알아갈수록 나의 ‘무재능’을 체감했다. 물 흐르듯 아름다운 아르페지오가 돋보이는 슈베르트의 즉흥곡(D.899 no.2, no.4)은 내가 치면 위풍당당한 행진곡으로 변했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마스터하겠다는 꿈은 3악장을 치기 위해선 열 손가락 모두 두 마디씩은 더 길어야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팔랑팔랑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쇼팽 에튀드(Op.25 No.9)는 나를 통해 대머리 독수리의 날갯짓으로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나를 좌절시킨 건 바흐였다. 바흐의 클라비어 악보는 읽기에 어렵지 않고, 화려한 화음도 없어 번데기처럼 짧고 굵은 내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심플할수록 아름답게 연주하긴 어려운 아이러니에 빠져 괴로웠다.


 그럼에도 바흐를 연주할 때 제일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나는 크림빵보다 크로와상을, 바닐라라테보다 플랫화이트를, 마가리타보다 테킬라 샷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바흐에 끌릴 수밖에.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바흐를 치지 않았다. 재능이 따라주지 않는 가운데 잘하고 싶은 마음만 커 허영심으로 나의 실력을 꾸며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 치는 것처럼 들리는, 기교와 화음이 복잡하고, 빠른 박자의 곡들만 골라 쳤다. 화려하게 들리는 재즈를 연주하고 싶어 화성과 코드는 익히지 않은 채, 박자를 쪼개고 멜로디에 변주를 준 악보를 미리 만들어 그대로 연주했다. 자유로움이 생명인 재즈를 악보에 기대어 기계처럼 연주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끌리는 곡보다는 유명한 곡을 연습했다. 누가 들어도 “와” 할 만한 곡으로. 히사이시 조의 작품 중 어둡고 무거운 ‘Just Want to Look at You’를 제일 좋아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밝고 통통 튀는 ‘Summer’를 쳤다. 바흐와 ‘어두운’ 히사이시 조를 다시 연주하기 시작한 건 임신을 하면서부터였다. 산모가 즐거운 게 최고의 태교라기에 나의 ‘무재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연주했다. 


 아기에게 임신 때 쳤던 곡들을 들려준다. 그때마다 방긋방긋 웃으며 원숭이처럼 ‘우우’ 하는 소리를 내는 아기를 보며 ‘나도 취향을 물려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추구하며 행복과 추억을 쌓는 게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내가 계이름을 알아맞히며 놀았다. 나란히 앉아서는 젓가락 행진곡을 쳤다. 엄마의 대학원 졸업 연주회 준비 시절 눈을 감고 연주를 들으며 “크레셴도! 여기는 데크레센도! 지금 리타르단도!”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빠와 함께 <오페라 이야기> 책을 읽고 ‘마탄의 사수’, ‘아이다’, ‘나비부인’, ‘카르멘’ 음반을 구해 듣고 지금 나오는 아리아가 이야기의 어떤 장면인지를 찾아보던 기억도 난다. 좌석에 앉아 연주 시작 전 모든 악기가 ‘라’ 음에 맞춰 조율할 때 설레는 마음에 서로 눈을 마주치던 것도. 그래서 못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좋아하고 즐기기로 결심하고 나는 글을 쓴다. 능력 있는 작가가 되진 못해도 행복한 작가가 되어 아이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을 잘할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내가 좋아하는 연주 영상을 짧게 덧붙인다.


슈베르트 즉흥곡 no.2 https://www.youtube.com/watch?v=f1p75jqhXqI

슈베르트 즉흥곡 no4. https://www.youtube.com/watch?v=d5JC1Yvx-1M

베토벤 월광 소나타 3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zucBfXpCA6s

쇼팽 에튀드 OP.25 NO.9 (Butterfly) https://www.youtube.com/watch?v=cKeley78hM4

바흐 클라비어 https://www.youtube.com/c/PaulBartonThailand (이 유튜버 채널에서 클라비어 전곡을 악보와 함께 즐길 수 있다!)

히사이시 조 Just Want to Look at You https://www.youtube.com/watch?v=n4yT3qkaPTc&list=RDn4yT3qkaPTc&start_radio=1&rv=n4yT3qkaPTc&t=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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