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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19. 2022

비누 대참사

 거북이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생 때는 유학생 신분으로 꽤 오래 자취를 했다. 그래서인지 결혼을 하고 나서 보니 그는 밥, 빨래, 청소에 능한 상당히 훌륭한 동거인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거북이 씨는 자신의 집안일 처리 능력 레벨을 높게 평가하여서 몇몇 집안일에 있어서 일반 상식과는 다른 자신만의 노하우 내지는 똥고집이 있었다. 거북이 씨에 따르면 귤, 오렌지와 같은 상큼한 과일 껍질을 일반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 속에서 껍질이 다른 일반 쓰레기의 냄새까지 상쇄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목격한 귤껍질은 햇빛이 들지 않는 쓰레기통 속에서 꿉꿉한 냄새를 풍기며 곰팡이를 피웠다.


 찬장에서 비누를 꺼낸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거북이 씨는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던 그 비누를 변기에 빠뜨렸다. 당장 꺼내라는 나의 외침을 뒤로한 채 거북이 씨는 강한 수압의 물이 자주 흐르기 때문에, 비누는 변기통 안에서 만 하루면 그 크기가 작아져 하수관으로 흘러들어 가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세정력을 가진 비누는 배수관을 따라 흐르면서 지나간 자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나는 거북이 씨의 주장이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변기 속 비누를 내 손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의 말을 믿어주고, 대신 모든 책임을 그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비누는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하지만 변기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비누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이 내려가는 모양새가 여전히 시원스럽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거북이 씨는 변기의 물 빠짐을 지켜보는 나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더니, 다시 한번 ‘나만 믿어’라며 득의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뼛속까지 문과 성향인 나에게 그는 이과생의 지식을 뽐내며 ‘알칼리’라든지 ‘산성’, ‘용해’와 같은 상당히 전문적으로 들리는 단어를 그럴듯하게 늘어놓으며 나의 판단력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거북이 씨는 변기에 다량의 식초를 부어두면 다음날 아침에 식초가 비누를 녹여 저절로, 아주 ‘뻥’ 뚫려 있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자신 있는 태도로 장담했다. 식초를 찾기 위해 부엌을 뒤졌으나 요리를 자주 하지 않던 우리였기에 그 흔한 식초가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거북이 씨는 결연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지’라며 냉장고 문을 열고 홍초를 꺼냈다. 그리고 홍초 한 병을 몽땅 변기에 들이부었다. 분홍빛으로 예쁘게 물든 변기 위로 커버를 덮으며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론 그다음 날 아침은커녕,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그가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나는 거북이 씨에게 표정으로 조용히 윽박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이 사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도구를 준비했다. 세탁소 옷걸이를 길게 펴 갈고리를 만들었다. 변기 속을 뒤적거리다 보니 마침내 비누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거북이 씨는 조악한 수제 갈고리로 비누를 물 밖으로 건져내고자 집중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화장실 문지방에 서서 이 사태를 모두 관망하던 내 눈치를 흘끔 살피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아이고’라는 맥없는 기합소리와 함께 비누를 손으로 잡았다... 놓치고, 또다시 잡았다가 놓쳤다. 며칠 동안 물속에서, 홍초 속에서 서서히 녹아가던 그 비누는 (거북이 씨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미끄러운 것들 보다도 더 미끄러웠다. 아무리 재빨리 손을 놀려도 비누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아주 쉽게 거북이 씨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비누를 잡았다가 다시 물에 빠뜨리고, 다시 건져 올렸다가 놓치는 짓을 반복하던 중에 우리는 미친 듯이 웃음이 터졌다. 절박한 거북이 씨의 몸짓 속에서 향긋한 꽃향기가 퍼지면서 변기 안에 비누 거품이 가득 피어올랐다. 호화로운 목욕을 위해 입욕제를 풀어놓은 수준이었다. 휴지를 손에 돌돌 말아 수북한 거품 속에서 마침내 비누를 건져 올린 거북이 씨는 ‘성공! 성공이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일화를 ‘비누 대참사’로 기억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맨 손으로 변기를 뚫은 성공담’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를 우리 집안 화장실 전문가로 인정해주었다. 거북이 씨가 화장실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일도 뚝딱뚝딱 해결하는 전문가의 정체성을 획득한 이후 나는 화장실의 거울도 한 번 닦을 일이 없었다. 오늘도 거북이 씨는 아기 욕조를 손이 데일만큼 뜨거운 물로 후루룩 씻어서 물기를 대충 털어낸 후 그 욕조를 안방에서 말린다. 보일러를 틀어서 건조하기 때문에 가습기로는 부족하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에게 일임한다. 사실 손빨래가 필요한 아기 턱받침 등을 슬쩍 화장실에만 가져다 두면 저절로 해결되는 이 시스템이 너무 편하다. 거북이 씨의 똥고집을 즐기고 있다. 


제목 사진 Photo by Isaac Quesad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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