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월드 도미니언, 맥파이 살인사건
작년 이맘때였다. 전날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눈을 비비면서도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영화관을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이어 아이스 바닐라 라테까지 연거푸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본 영화는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이었다. 길고 긴 공룡 시리즈의 완결이었다. 그리웠던 그랜트와 새틀러, 말콤 박사의 컴백과 더불어 이전 시리즈의 오마쥬가 가득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설렜다. 영화 마지막에 빌런인 바이오신 기업의 CEO 도지슨은 면도 크림 통에 공룡 수정란을 숨겨 섬을 탈출하려다 목도리도마뱀을 닮은 딜로포사우르스에게 살해당한다. 이 장면은 <쥬라기 공원 1>의 첫 장면, 비 오는 밤 뚱땡이 직원이 공룡 수정란을 숨긴 면도 크림 통을 들고 도망치다 죽는 첫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도 역시 딜로포사우르스에게 공격당했다. 마치 전체 시리즈의 처음과 마지막이 수미상관을 이루며 완성된 듯했다. 영화에 대해 호평과 혹평이 공존했지만, 나에게는 20년에 걸쳐 다시 모인 ‘우리 편’은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이 쥬라기 공원-월드 시리즈의 피날레로 손색없었다.
쥬라기 공원은 특별하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관에서 본 첫 영화가 <쥬라기 공원 2: 잃어버린 세계>다. 영화 시작 전 화장실에서 이 영화가 무섭다고 엄마 아빠에게 고백해야 하나 고민했던 게 생생하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공룡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영화를 보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비디오로 <쥬라기 공원 1>까지 챙겨 봤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들을 찾아내 공룡 대백과 사전에 동그라미를 쳤지. 어린 시절 공룡에 대한 사랑은 지금 내가 가진 미스추에 대한 사랑과 모양이 비슷하다. 미스추란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를 합쳐서 일컫는, 내가 만든 용어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미스추’라는 조어에 만족하지 않고, 내 맘대로 각 장르에 대해 정의까지 내렸다. ‘미스터리’는 미지의 존재가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접촉하는 이야기. ‘스릴러’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과 서스펜스. ‘추리’는 탐정이 등장하여 이미 일어난 일을 해결하는 후더닛(whodunnit) 장르를 의미한다. 내가 좋아하는 미스추 작가의 이름만 나열해도 이 한 페이지를 거뜬히 채울 수 있을뿐더러, (들어만 준다면) 작가의 추천작들을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앤서니 호로비츠의 <맥파이 살인사건>은 첫 시작부터 미스추 팬의 가슴을 뛰게 한다.
"와인 한 병. 대용량 나초 치즈 맛 토르티야 칩 한 봉지와 매운 살사소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그리고 책 한 권. 이보다 더 근사한 풍경이 어디 있을까?"
주인공 수전이 소설 속 인기 추리 작가 앨런 콘웨이의 신작 원고를 큰 쟁반에 와인, 나초를 함께 담아 들고 침대에 오르며 하는 생각이다. 사위가 조용해진 한밤중 속이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를 텀블러에 담아 추리소설을 들고 침대 속에 들어가는 내가 겹쳐 보이는 장면이다. 내가 읽는 소설 속 살인마와 사이코패스, 괴물은 두려운 존재지만 날 겁먹게 만들진 않는다.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 나는 포근한 이불속에서 안전하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대 공룡은 무섭지만 이미 멸종된 그들은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다. 나는 공룡으로부터 안전하다. 이 편안함이 어린 시절 내 키만큼 커다란 양치식물을 보며 공룡에 대한 상상 속에 마음껏 빠져들게 했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내가 사는 세상에 등장한 낯선 생명체가 주는 파장과 스릴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는 깃털 달린 공룡이 등장한다. 많은 공룡이 피부가 매끄럽고 갑옷처럼 단단한 동물이 아니라 조류에 더 가깝다는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파충류스럽지 않은 공룡은 어딘가 괴기스러웠다. 연구에 따르면 벨로시랩터의 경우 사나운 새처럼 생겼는데, 랩터는 쥬라기 시리즈를 통틀어 마스코트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쥬라기 공원 1>에서 처음 본모습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쥬라기 공원-월드 시리즈를 SF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영화가 비과학적인 잘못된 정보를 알린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쥬라기 월드 속 랩터의 생김새-새보다는 파충류를 닮은 모습-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적 고증을 거쳐 깃털을 달고 나온 공룡이 ‘괴물’스럽다고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쥬라기 공원-월드 시리즈를 과학과는 전혀 관련 없는 ‘크리쳐’ 장르로 받아들여 왔다는 것을. 즉, 나의 기준에서 쥬라기 공원은 낯선 존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장르에 속하는 것이다. 오, 이제 보니 나의 미스추 사랑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