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은코로나 시국에하루키 라이브러리를개관한다. 당시에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었고, 하루 입장 인원도 제한되어 있었다. 갈 수 없던 나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의 방문 후기를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작가의 팬이 아닌 사람은 심플하게 동네 서점이나 문구점 다녀온 듯 후기를 적어놓았다. 반면 하루키스트의 방문 후기는 읽는 쪽에서도 뭉클해질 정도였다. 나도 언젠가 저 장소에 서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생각한 대로 이루어졌다.
지하철역 입구에 무료 신문이 쌓여있던 2000년대 초반, 나는 종종거리며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출근길 2호선에서 읽던 신문의 교토 아라시야마를 소개하던 기사는 내게 막연한 꿈을 심어주었다.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직장을 떠나리라는 것. 나도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그리고 3년 후 나는 정말 교토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닌 가이드북을 든 채였지만. 그리고 이젠 확연히 안다. 여행하며 글 쓰는 삶이 우리가 꾸는 꿈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24시간 키보드 노동자로 사느라 여행지를 만끽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본말전도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아무튼 이런저런 하루키 도서관의 글을 찾아보는 와중에 문화지에 실린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원고 청탁을 받는 사람이 쓴 글이라 문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TMI를 방출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하루키 도서관 정보까지 몇 편이 더 연재되어야 할까 싶었다. 그렇게 그 글은 기다리다 잊혔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불현듯 드는 생각이지만 내 글이야말로 TMI가 아닌가.
첫날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였다. 우리는 이날 꽤 많은 것을 파악했다. 은선님은 영어를 매우 잘한다는 것, (그녀는 영어 강사라 당연하다) 도쿄에서는 영어가 꽤 통한다는 것, (도쿄외의 지역에서는 어림도 없다) 혜경님은 체력이 약하다는 것 (나는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은 일본어를 많이 까먹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저녁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그 유명하다던 츠타야 서점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도쿄여행 전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을 읽었다. 그는 츠타야 서점의 성공신화 주인공이다. 그의 경영 성공 전략과 인생철학이 담긴 <지적자본론>을 읽으며 꼭 츠타야를 방문하리라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 하루키의 원서와 영어 번역본을 발견하고 흥분했다. 하루키의 책을 발견한 순간 <지적자본론>의 내용과 츠타야를 방문한 목적은 이미 휘발되었다. 내일 방문할 하루키 도서관을 미리 예습하는 기분이랄까?
츠타야서점 다이칸야마의 하루키 코너
마음의 흥분도 육체의 피로는 덮어주지 못했다. 에비스역으로 돌아오는 길을 살짝 헤맨 우리는 천근만근인 몸으로 새삼 나이 들었음을 실감했다. 각자의 휴대폰에 꽂아 넣은 유심조차 우리를 닮은 건지 버벅거렸다. 일본에서 이렇게 인터넷이 안 터지긴 처음이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자신의 바닥이 드러나는 줄 잘 모른다. 어릴수록, 오만할수록, 메타인지가 안 될수록 모른다. 나이 들며 좋은 점은 그 순간을 바로 알아챈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타일렀다.
to be continued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책을 읽고, 배운 것을 바로잡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한다.”-자코모 카사노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