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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30. 2021

아를에서 고흐를 만나다

- 지난 2월에 만났던 고흐 -

  

  눈이 내린다. 공중에 흩날리던 작은 눈송이가 어느새 커져 함박눈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하늘과 산의 경계를 지운 눈이 산과 들, 창밖의 낮은 지붕과 마당을 하얗게 덮고 있다.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나뭇가지에 싹이 돋는다는 우수가 모레인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겨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함박눈 덕분에 새로 맞는 봄은 더 찬란할 것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다가 아를에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다. 파리를 떠나 기력을 회복하고 평온을 되찾기 위해 고흐가 아를에 올 때는 겨울이었다. 편지에서 고흐는 “지금 아를은 육십 센티미터 이상의 눈이 쌓여 있고,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까 백삼십삼 년 전 이월 이맘때쯤 아를엔 폭설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고흐가 만났던 눈 덮인 아를의 풍경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십사 년 전 내가 처음 아를에 갔을 때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칠월 말, 한 여름이었다. 그즈음 난 그림에 빠져 미술 관련 책을 읽고, 전시회를 찾아다니고, 크고 무거운 화집을 사서 펼쳐보곤 했었다. 마음 가라앉힐 일이 있으면 좋아하는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했었다. 손바닥 만한 스케치북엔 2007년 1월 1일에 사인펜으로 그린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다. 아마 그날도 마음이 꽤나 복작거렸나 보다. <밤의 카페 테라스>를 따라 그렸던 그해 여름 난 아를에 갔다. 아를은 고흐가 1888년부터 이듬해 오월 초까지 머물며 화려한 색채의 작품들을 남긴 곳이다.      


  그때 난 친구와 동료 여덟 명과 함께 유럽 자동차 여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남프랑스의 아를에 들른 것은 순전히 고흐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 기억 속 남아있는 아를의 풍경은 고흐가 사랑했던 작열하는 태양과 고흐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들이다. 아를 원형경기장에서 바라보았던 황갈색 지붕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던 아를시와 도시를 감싸고돌아 흐르던 푸른 론강, 강변에서 맞았던 바람의 기억이 떠오른다.      


  고흐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그림자 위로 쏟아지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두세 층으로 겹쳐 앉은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수많은 군중들이 기가 막히게 멋있었다.”라고 한다. 내가 고대 원형경기장에서 만난 것이 작열하는 태양과 바람, 고요였다면 고흐가 만난 것은 이글거리는 태양과 군중들의 함성, 화려한 색채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고흐의 그림 <랑글로와 다리>가 있던 곳,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 시립병원의 정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 그곳의 공기와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처럼 밝고 부드럽고 평온한 환경 속에서 나의 몸도 마음처럼 의욕과 희망에 넘쳐있다” *      


   아를의 ‘청명한 분위기와 화사한 색채’는 고흐를 의욕과 희망에 차오르게 했다. 아를에서 그린 그림들에는 초기 그림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밝고 화사한 색채로 가득 차 있다. 밤 풍경을 그린 <밤 카페>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조차 검은색 대신 온통 푸른색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 <해바라기>도 아를에서의 작품이다. 고갱과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차 그의 작업실과 고갱의 아뜰리에를 장식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고갱이 고흐 곁을 떠나기 전까지 아를에서 보낸 시기는 고흐 생애 중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아를에 머물 때 그린 그림들은 밝고 화사하고 강렬한 색채가 넘쳐난다.      


   그림에 홀려 있을 때 열화당에서 나온 파스칼 보나프의 ≪VAN GOGH≫화집은 고흐의 삶과 그림에 빠져들게 했다. 고독하고 불우했던 고흐의 삶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었다. 고흐를 생각하면 ‘미치거나 죽거나’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의 눈에, 마음에 들어온 것들을 향한 그의 열정과 사랑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 광부들과 함께 할 땐 광부가 되었고, 거리의 여인을 만났을 땐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삶을 돌봤다. 아를에서 고갱을 기다리며 노란 집에 아뜰리에를 꾸밀 땐 몇 주일에 걸쳐 정성을 쏟았고, 고독과 힘든 상황을 이겨낼 ‘마지막 보루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고갱’이 떠난다고 했을 땐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그가 ‘이성의 거의 반을 내팽개친 채 일생을 걸었던’ 그림은 목숨까지 내던지게 했다. ‘미치거나 죽거나’란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삶이 또 있을까. 어쩌면 그래서 무수한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흐는 가난과 고독, 발작과 정신착란을 안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잊게 하는 것이 있었다. 몸과 정신이 망가져 쓰러질 때까지 투신할 그림이 있었고, 그런 그를 돌보며 끝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동생 테오가 있었다. 고흐가 살아있을 때의 영광은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순수함과 진정성, 예술성, 한계를 넘어서는 표현력을 발견하고 인정한 알베르 오리에의 비평과 유일하게 팔린 작품 <붉은 포도밭>이 전부였다고 한다.      


   짧았지만 고흐에게 아를의 시기가 있어 다행이다. 아를은 그에게 유일하게 밝고 부드럽고 평온한 기운을 전해준 곳이다. 아를에서 꽃 피웠던 그의 작품들은 그가 사랑한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한 사람들 가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아를에 가게 된다면 고흐가 사랑했던 곳들을 찾아 고흐의 시선과 마음으로, 좀 더 오래 바라보며 그가 보았던 빛과 색채를 담아오고 싶다.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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