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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Dec 15. 2021

어떤 결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 -

   ≪댈러웨이 부인≫은 영화를 통해 먼저 만났다. 본 지가 오래되어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댈러웨이 부인 클러리서가 걸었던 본드 가의 분주한 모습과 꽃을 사던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을 때면 영화에서 생략한 장면들과 세부 묘사를 읽는 즐거움과 감동이 크다.


   ≪댈러웨이 부인≫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을 배경으로 한 50대 초반의 상류층 여인 클러리서 댈러웨이가 겪은 6월 어느 날,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클러리서가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내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라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 시점이 수시로 바뀐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 장면을 번갈아 가며 반복해서 읽었다. 35쪽을 읽는데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클러리서(댈러웨이 부인)는 ‘결혼 생활에서 매일매일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 사이에서 조금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권리, 다소 독립된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녀의 옛 연인 피터와는 ‘모든 것을 공유해야 했고, 모든 것을 자세히 의논해야 해서 그런 것들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세계가 반영된 것 같다.

 

   내 주위엔 남편 간섭 때문에 모임이나 여행,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난 자유로운 편이다. 남편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 걸음 뒤에서 응원할 뿐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보름이나 한 달씩 여행이나 연수를 떠날 때도 집안일이나 아이 챙기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게 해 주었다. 결혼 초엔 오히려 내가 남편이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었다. 일과 공부에 집중하면서부터 남편 일정이나 행동반경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각자 삶이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영역과 활동을 존중하게 되었다. 종종 공유하는 부분에선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부부 사이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상황에 따라 가장 먼 관계이기도 하다. 서로의 삶이 조화롭게 꽃필 수 있는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오늘날을 사는 부부들도 서로 독립된 세계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20세기 초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려 했던 작가의 의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클러리서는 자신의 외모와는 다른 모습이기를 바란다. ‘다소 몸집이 크고, 남자처럼 정치에 관심이 있고, 시골에 집을 가지고 있고, 아주 위엄 있고, 아주 신실하였으면’ 한다. 여기서 클러리서가 갈망하는 모습은 당시 남성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정치에 관한 관심, 언제든 떠나 머물다 올 수 있는 시골집, 위엄 있고 신실한 모습 등은 특권을 누리는 남성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벡스버러 부인이 되고 싶어 하는 클러리서의 마음을 통해 작가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가질 수 없었던 지위와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더 이상 결혼하는 일도 없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갖는 일도 없이 단지 나머지 모든 이들과 함께 본드 거리를 걸어가는 이 놀라운 그리고 약간은 엄숙한 행진이 있을 뿐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이 존재가 말이다. 더 이상 클라리서가 아니다. 이 존재는 리처드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20쪽)


  클러리서는 완두콩 가지처럼 마른 몸에 작은 얼굴은 새의 부리를 닮았고, 서 있는 모습은 횃대에 앉은 새처럼 꼿꼿했다. 손과 발을 아름답게 가꾸고 옷도 잘 갖추어 입으며 자신을 관리해 왔다. 그런데 그녀는 그 모든 것의 기능을 무가치하게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은’,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더 이상 결혼하는 일도 없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갖는 일도 없는’, ‘더 이상 클라리서가 아닌, 리처드 댈러웨이 부인’ 일뿐임을 직시한다.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은 고유성을 지닌 존재 클러리서를 지워낸 자리에 댈러웨이 부인의 지위를 부여했다. 신화에서 결혼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찾아 완벽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클러리서에게 결혼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기 이름 대신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알려지지도 않게 되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결혼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며 확장해 갈 수 있을 때 의미를 지닌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그늘에 가려지거나, 그 지위나 권력, 관습에 존재가 잠식되고 소멸해간다면 결혼은 필요악이 된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울프의 페미니즘 시각과 온전한 존재로서의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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