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찌민에서 만난 베트남 -
무이네에서 호찌민시로 가는 길엔 슬리핑 버스를 탔다. 침대에 누워 이동하는 동안 눈길은 차창 밖 흘러가는 풍경을 따라갔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언덕의 나무들, 초록 들판 가운데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을의 붉은 지붕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긴 세월 식민지와 전쟁의 비참을 견뎌온 땅이란 걸 잊게 해주는 풍경이었다.
호찌민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에 있는 무이네에서 만났던 자연은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요정의 샘”이라 불리는 협곡의 물길을 걷을 땐 맨발에 닿는 미세한 모래의 부드러운 감촉과 발목에 감기는 물살의 느낌이 좋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따끈한 햇살 아래 물길을 걷는 동안 여행의 여유로움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화이트 샌듄의 하얀 모래 언덕과 맞닿은 짙푸른 하늘이 빚어내는 풍경은 무구하고 신비로웠다. 지프와 오토바이를 타고 경사가 심한 모래 언덕을 오르내릴 때의 짜릿함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의 따가움조차 잊게 했다.
무이네 휴양 단지 내의 랑동 그룹이 운영하는 “RD 와인캐슬”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생산한 와인을 보관하고 있었다. 저장고 안에는 양쪽 벽면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와인 병들(26종, 20만 8,000병)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벽면 위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비롯한 포도주와 관련된 그림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림 아래엔 “와인은 삶을 더 여유롭게 만든다.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너그럽게 해 덜 서두르게 한다.”(Wine makes daily living easier. Less hurried with fewer tensions and more tolerance.)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와인에 대한 소견이 쓰여있었다. 문구를 읽고는 “와인은 여행과도 같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긴장을 내려놓게 하고 세상과 삶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지게 하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았다. 전날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한 무이네 투어는 내게 한 잔의 와인 같은 시간을 선물했다.
슬리핑 버스가 호찌민시에 가까워졌을 때 우린 버스를 갈아타고 호찌민 시내로 향했다. 호찌민시는 오랫동안“사이공(Saigon)”으로 불리다가 1976년 남북 베트남 통일 후 “호찌민시(Ho Chi Mine City)”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이공은 베트남전 배경의 강렬하고 극적인 뮤지컬 <미스 사이공> 덕분에 내겐 특별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미스 사이공>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영혼이 망가져 가는 미군 하사 크리스와 폭격으로 부모와 동생을 잃은 열일 곱 소녀 킴의 비극적 사랑과 전쟁의 상처를 다룬다. 미군과 베트남 여인 사이의 혼혈아는 “부이 도이”라 불리며 삶의 먼지 같은 존재로 차별당했다. 킴이 아들을 끌어안고 넘버“널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바칠 거야. (I’d give my life for you)”를 부를 때 절규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마음을 울렸었다.
사이공은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점령하에서 상업과 경제 중심지로 성장했다. 1954년 이후 분단 시기엔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베트남 전쟁 중엔 미국 군사작전의 본거지였다.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뀐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여행 중 호텔이나 도로변 가게 상호에서도 사이공이 들어간 이름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린 먼저 호찌민시 중앙 우체국으로 향했다. 중앙 우체국은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프랑스 특유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노란색 외관의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의 기념품 판매장과 편지를 쓰는 테이블 양옆으론 우편 업무를 보는 창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이 끝나는 곳 벽면 한가운데 커다란 호찌민 사진에선 베트남인들의 영웅인 호찌민의 위상과 존재감이 느껴졌다.
호찌민은 사회주의 혁명가였지만 항상 베트남의 독립과 베트남인들의 자유로운 삶을 먼저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배트민 전쟁을 지휘하며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배낭을 메고 산길을 따라 하루에 50km를 걸었다. 마지막 유언장에선 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서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라고 했다. 또 평화가 회복되면 정부가 1년간 농업세를 면제해 베트남 인민이 전쟁 중 겪은 곤경에 보답하고, 피로 얼룩진 기나긴 전쟁 중 인민이 보여준 노력과 희생에 직접 감사를 보여주길 바랐다. (윌리엄 J. 듀이커, 푸른 숲, 2003, p.814)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에 바쳐온 그의 삶과 휴머니즘을 잘 보여준다.
탐방 마지막 날 우린 꾸찌 터널 투어를 위해 호찌민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꾸찌로 이동했다. 꾸찌 터널은 베트콩들이 프랑스와 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든 총 250km의 터널이다. “베트콩”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공산 게릴라 부대를 말한다. 탐방로 주변엔 전쟁 당시 사용된 다양한 형태의 부비트랩과 벙커, 무기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각각의 부비트랩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설명을 들을 땐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몸이 오싹해졌다. 현지 가이드는 개미굴처럼 복잡한 터널 안에 무기 창고, 침실, 회의실, 극장, 병원, 식당 등 전쟁과 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고 했다.
터널 체험은 제주 4.3 항쟁 유적지 탐방 때 좁고 깜깜한 굴속에서 느꼈던 폐소 공포증이 떠올라 망설여졌지만 짧은 코스가 있어 도전했다. 이십여 미터의 짧은 거리였지만 쭈그려 앉은 자세로 터널 속을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터널 체험 내내 푹푹 찌는 더위 때문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땀을 계속 닦아내야 했다. 터널을 나와선 베트콩이 먹었다는 삶은 마와 차를 맛보았다.
“잠깐의 체험도 이렇게 힘든데 베트콩들은 전쟁 내내 어떻게 견뎠을까 상상이 안 돼요.”
“푹푹 찌는 더위에 열악한 음식,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엄청났을 것 같아요.”
우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삶은 마를 먹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려 했다. 꾸찌 터널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전쟁을 치렀던 베트콩들의 삶과 전쟁 중 무참하게 사라져 갔을 무수한 목숨을 떠올리게 했다.
호찌민시로 돌아와 들른 전쟁박물관에선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박물관 안뜰엔 전쟁 중 사용했던 탱크와 헬리콥터, 비행기 등 전쟁 장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1층에선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동참했던 세계 각국의 시위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시위 사진에서 당시 베트남전에 대한 세계 여론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2층과 3층 전시실엔 전쟁 중 폭격과 고엽제 피해로 찢기고, 잘리고, 부서진 주검들, 부풀고 뒤틀린 기형의 몸들을 담은 사진이 가득했다.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사진 앞에서 자꾸만 구토증이 올라왔다.
종군 기자들 이야기와 사진을 전시한 곳에선 베트남과 프랑스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이야기와 그의 마지막 필름 “타이빈 가는 길(The Road to Thai Binh)”을 볼 수 있었다. 미군의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닉 우트(Nick UT)의 “네이팜탄 소녀(Napham Girl)”에선 전쟁의 무자비함이, 폭탄 파편으로 만든 조각품 “마더(Mother)” 에선 전쟁의 비참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여전히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떠올랐다. 박물관 벽에 걸린 사진 속 참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허구처럼 느껴졌다.
저녁 무렵 호티키(HO THI KY) 야시장 가는 길에 만난 도로는 오토바이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토바이 행렬은 아슬아슬 위험천만해 보이는 상황을 피해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야시장은 상인들 호객 소리와 오가는 관광객들로 요란하고 복잡했다. 우린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집고 겨우 꼬치구이 매대 안쪽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여주인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꼬치를 구워 나르느라 바빴다. 바로 옆 매대의 아주머니는 사탕수수 대를 기계에 넣고 즉석 사탕수수즙을 짜내고, 아이스크림 매대에선 어린 청년이 “아보카도 아이스크림”을 연달아 외치며 손님을 불러 모았다.
우린 꼬치구이와 에그 볼 등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호찌민 최대의 전통시장인 벤탄 시장으로 향했다. 벤탄 시장은 베트남 커피와 식료품, 전통의상, 액세서리,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 수천 개가 들어선 도매시장이라고 했다. 시장은 손님을 부르는 소리와 흥정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현지 가이드는 물건을 살 땐 일단 가격을 50% 깎아 흥정을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우린 커피 상점을 찾아 나섰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 2위의 커피 생산 국가였다.
“언니, 베트남 커피 최고 이거 인기 좋아요. 한 상자에 150,000동.”
“너무 비싸요. 70,000동에 주세요.”
“안 돼. 70,000동 너무 싸요. 100,000동.”
“열 상자 살 거니까 대신 한 상자에 80,000동(한화 4,500원 정도) 좋지요?”
흥정 끝에 우린 싸고 질 좋은 베트남 드립커피를 한 보따리씩 샀다. 베탄 시장 근처 49층 높이의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는 도로 위 오토바이 물결과 시장의 역동적 에너지를 끌어모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최고급 브랜드 매장의 쇼핑몰과 호텔, 고급 레스토랑, 전망대를 갖춘 베트남의 최고층 빌딩 “랜드마크 81”은 베트남식 자본주의 “도이머이(1986년 채택된 경제사회 개혁 정책으로‘쇄신한다’를 뜻한다)”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린 마지막 여정으로 인민위원회로 불리는 호찌민 시청 앞 광장에 갔다. 광장의 왼쪽엔 고풍스러운 렉스 호텔 사이공이, 호찌민 동상 뒤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인민위원회 건물이 환하게 밝힌 조명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인민위원회 앞에 우뚝 서 있는 호찌민 동상은 참혹한 시간을 견디고 이겨낸 베트남인들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사이공”과 “호찌민”이라는 이름이 혼재한 도시 호찌민시에선 식민지와 전쟁의 아픈 상흔 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정치체제와 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역동성이 뒤섞인 두 얼굴의 호찌민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