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집시의 춤

by 혜아

그해(2019) 사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햇살은 풍요롭고 따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했다. 가로수 자카란다의 보라색 꽃들이 스페인 광장과 세비야 대성당, 알카사르 왕궁 등으로 고색창연한 도시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친구와 난 구시가지 산타크루즈 지구로 향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세비야 대성당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남녀 한 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검은색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가 있는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에 든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하얀 셔츠에 빨간 스카프, 빨간 바지에 검은 구두를 신은 남자 댄서가 나무판 위에서 현란하게 스텝을 밟았다. 절도 있는 발동작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내 발가락도 까닥이며 춤을 췄다. 친구와 난 남자 댄서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아련한 표정 좀 봐.”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 얼굴이야.”

“저 두 사람 연인 같지 않아?”

“그러게. 춤이 서로를 유혹하는 것 같아.”

세비야에서의 플라멩코 공연 관람을 고대하던 중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플라멩코에 푹 빠져 우린 넋을 잃고 있었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에서 마주친 플라멩코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린 세비야 대성당 주변을 둘러보고 여행 책자에서 안내한 공연장을 찾아 나섰다. 비슷비슷한 골목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극장식 레스토랑 공연장인 ‘타 블라오 엘 아레날(Tablao El Arenal)’을 찾을 수 있었다. 칠십 유로에 표 두 장을 예매했다. 음료를 마시며 한 시간 반 동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친구는 와인을 난 레드 와인에 각종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간 샹그리아를 주문하고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엘 아레날’의 공연은 낮에 거리에서 보았던 공연과는 규모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여러 명의 남녀무용수 외에도 기타 연주자와 가수까지 다양한 역할의 출연자들이 어우러져 공연을 펼쳤다. 공연은 극적이고 화려했다. 댄서들의 고혹적인 몸짓과 리듬감 넘치는 발 구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손가락 끝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래와 춤의 흐름을 따라 내 몸과 마음도 고조되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플라멩코는 불꽃을 뜻하는 ‘플레임(flam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플라멩코는 자신의 몸을 불쏘시개 삼아 영혼까지 훨훨 태우고 사그라지는 불꽃을 닮았다. 플라멩코 공연에는 ‘두엔데(duende)’라는 영혼의 폭발을 체험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엘 아레날’의 공연에서 ‘두엔데’의 순간을 느꼈었다. 나이 든 가수의 거칠고 쉰 목소리가 깊은 슬픔과 고통을 토해낼 때, 무용수의 격렬한 발동작과 몸짓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였다.

플라멩코 음악의 가사는 주로 집시들의 고난과 박해, 운명의 잔인함과 사랑의 고통을 담고 있다. 공연장에서 보았던 플라멩코가 애절한 곡조와 울부짖음, 영혼을 불러내는 춤으로 집시의 설움과 비탄의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면, 거리에서 보았던 플라멩코는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했다.

플라멩코 매력에 빠진 뒤 알게 된 집시의 삶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수백 년을 차별과 천대, 학대와 학살의 대상이 되어 떠돌며 살아야 했던 집시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내게 ‘엘 아레날’에서의 플라멩코 공연은 천대와 박해를 받으며 불가촉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집시들 삶의 애환과 고통을 풀어내는 한풀이 굿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시(Gypsy)의 어원은 이집트인을 뜻하는 이집션(Egyptian)에서 왔다고 한다.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흘러와 이집트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집시의 오랜 유랑생활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쫓게 하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유전자 속에 심어준 것 같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자유롭고 강렬한 성격의 집시 여인 카르멘은 그녀를 사랑하게 될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하며 ‘하바네라’를 부른다.


사랑은 들에 사는 새처럼 자유로워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

~

사랑은 집시처럼 자유로워

피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달아나지

-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 부분 -

노랫말에서 집시의 삶과 사랑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천대와 박해로 시작된 유목은 늘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게 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욕망, 이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 대한 열망은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 삶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우리 뼛속 깊은 곳에도 유목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게 하는 여행이 아닐까? 현대인에게 유목이라는 말은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욕망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을 향해 기꺼이 첫걸음을 내딛게 한다. 언제든 또 무엇인가가 세비야에서 만난 플라멩코가 되어 내 몸에 새겨진 유목의 세포를 깨울 것이다. 그때마다 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서 무언가에 사로잡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서 있을 것이다.



* 다시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찌민의 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