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의 간병을 위해 내가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겠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길고 끝도 안 보이는 병간호에 지쳐 도피처를 찾아 마포구청에 취업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며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새 없이 일에 치이는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 찌들어 정신없이 보냈다. 때로는 엄마 같고, 언니 같던 같은 팀 주임님이 먼저 엄마를 떠나보냈던 선배로서 외로움과 우울감이 몰려오는 때가 있으니 자신에게 기대라는 조언을 해줄 때까지만 해도 그 힘든 시기를 다 겪으면서도 죽고 싶단 생각 한번 해보지 않고 더 잘살아 보겠노라 다짐했던 독한 나 자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나약해질 줄은 미처 생각을 못했다. 마침 지금 신랑이던 남자 친구의 여러 가지 실망된 모습에 더 철저히 힘들고 외로웠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첫 생일날
해년마다 내 생일이면 답신 없는 문자를 보내던 아버지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애써 누르고 있던 그리움이 폭발했다. 중3 때 내가 울며 불며 매달림에도 불구하고 재혼하시겠다고 선포한 후 내 마음과 추억에서 아버지를 깨끗이 지워버리겠다 다짐했는데 그 순간 아버지가 간절해졌다.
어머니의 빈자리만큼 아버지가 더 간절히 그리웠다. 당장 가족들 곁으로 가야겠다 마음먹고선 그 좋은 자리에 또 사표를 내 던졌다.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주임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내 계획과 다르게 처음 해보는 월세살이가 발목을 잡았다.
계약기간 안에 집을 뺄 수 없다는 집주인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믿고 다른 직장을 구해 계약기간을 채워야 했다. 떨어지던 낙엽만 봐도 눈물이 쏟아졌던 시기라 일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추스르고 안정해야 하는 게 시급했지만 매월 나가는 월세, 생활비, 보험료 등 백수로 감당하긴 벅찬 상황 때문에 꾸역꾸역 일자리를 찾았다.
집에서 20~30분 거리에 있는 논술학원에 이력서를 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항상 글 쓰는 직업을 가지라 하며 응원해준 덕분에 각종 시 대회에서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비강남이지만 열성 엄마들이 득실거리는 논술학원에 용기 내어 이력서를 냈다.
면접 때 원장님께 나의 솔직한 상황도 말씀드렸다. 집 계약기간이 차는 때까지만 일하겠노라 엄마를 잃고 심신이 너무 황폐해져 있다. 독서로 치유받고 싶다 등
구청을 그만둔 것은 근래에도 이따금씩 후회되긴 한다. 버티고 있었으면 한층 내가 성장해져 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때 내가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혹 생을 달리 하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운 생각도 든다.
논술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반의 독서지도를 주로 했다. 정독 훈련을 메인으로 토론도 하고 일기도 쓰고 각종 글쓰기를 지도한다. 덕분에 초등 필독서를 시작으로 학원에 구비된 엄청난 양의 책을 틈틈이 읽어야 했다.
내 주 업무는 아이들의 정독 능력 향상을 위해 주어진 시간에 아이들이 읽은 내용을 정리하면 중심 소재에 맞춰 잘 요약했는지 첨삭하는 업무라 정확하게 내용을 인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책을 여러 번 그리고 신중하게 읽었던 것 같다. 다행히 아이들 도서라 용기와 희망을 주고 도전과 열정을 응원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적인 책들이 많아 정서적 위로도 많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시간이 흐르고 내 정서가 안정이 되고 대기업에 취업해서 내 삶을 사노라니 멀리했던 책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거기에다 아이를 낳고 오랜 육아휴직 기간까지 보내다 보니 정신적으로 위기가 또 찾아왔다.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긴 육아휴직 시간 덕에 성장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애를 키우고 나면 회사에서는 나를 다시 받아주겠지만 내가 과연 적응하며 일할 수 있을까? 너무 오랜 시간 집안 살림에 애만 키우다 보니 입사동기들의 승승장구를 보며 도태되어 있는 기분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간 많은 독서 모임을 찾아 헤맸지만 책을 매개로 그저 친목모임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은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성장판 독서모임이 광양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바로 등록을 하게 되었다.
난 2020년 첫 독서모임 하는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나를 제외한 평균 연령이 5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처음 보는 회원들과 책에 대해 나누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너무 소중해서 주변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나보다 먼저 인생의 길을 걸으신 선배님들의 주옥같은 삶의 나눔과 같은 책을 보고도 각기 다른 시각들은 한 권의 책을 6~7번 보는 기분을 만들었고 뭔가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단박에 옳은 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이정표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성장판 독서모임을 2년 동안 하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다시 나의 마음을 글로 적어낼 용기가 생겼다는 점이다. 제목에 적어놓은 니체의 경어를 인용해 덧붙이자면 이제야 비로소 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노래도 슬픈 발라드만 좋아하고 책도 소설이나 인문학만 편독하는 나는 성장판을 통해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사고의 확장도 경험할 수 있었다. 독서를 통해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도 생기고 뭐랄까 내적 치유 같은 내면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2년이란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지역에서 하는 독서모임만큼이나 주제에 맞춰 만들어진 소모임 덕분에 배워가는 것도 참 많다.
성장판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저 주어진 내 일상 속에서 좁은 시야의 답답함도 일절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갔을 텐데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자극받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래서 이 독서모임 이름이 '성장판'인가 싶다.
2021년, 예년처럼 많은 계획으로 출발했지만 그저 계획에만 그친 많은 목표들 속에서도 함께 하기에 꾸준히 할 수 있었던 독서모임 덕분에 2022년 내 운명 또한 좋은 책과 함께 하겠노라 신년 계획을 세워본다.
#성장판참여후기:조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