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고 우리 집 가족행사 시즌이 시작되는 기념적인 달이다.
5월 14일 결혼기념일을 시작으로 5월 말 여섯째, 6월은 엄마, 7월은 셋째, 8월은 둘째와 다섯째, 9월은 첫째, 10월은 아빠, 11월 한 달 건너뛰고 12월 크리스마스, 1월 넷째 생일을 끝으로 가족행사의 비시즌을 맞이한다.
나는 여섯 명을 다 유도분만으로 낳았는데 11개월 차이 나는 아이들을 40주를 안 채우고 낳은 데는 사실 생일 달이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도 있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이 깊은 뜻을 알려나..) 어릴 때 엄마생신이 어린이날이라 어린이날이 어버이날 같이 느껴져서 싫을 때가 있었는데 혹여나 아이들이 자라서 다들 자립했을 때 이번 달에 누리랑 시온이 생일이니 이번 주말에 다 같이 모여 밥 먹자라는 말로 내 아이의 일 년의 한 번뿐인 소중한 날을 서운하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본의 아니게 남편 휴가 일정 때문에 둘째와 다섯째가 같은 달에 생일을 맞이 하지만 꼭 생일상은 따로 챙기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고 가장 처음 생일을 맞는 넷째 아린 작년에 자기 생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날에 우는 사진을 남겼다. 신년 초에 가장 먼저 자기 생일이 시작됨에도 중간에 비시즌이 있다 보니 자기 생일이 가장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탓에 모든 사람 생일에 잔뜩 꼴이 나있다. 어찌 됐든 가족행사가 다달이 있다 보니 준비가 버겁기도 하고 부담도 되지만 그만큼 서로 웃고 축하하고 행복하게 웃는 시간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가끔 남편과 부부싸움을 한 상태에서도 아이 생일이 연달아 자주 있기에 티 내지 않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게 곤욕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남겨진 가족사진 속에 미소를 잃은 남편 모습을 시간이 지나서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이 많다 보니 기념일 말고도 소풍, 현장체험학습,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행사, 부모참여 행사 등 하루에도 3~4개의 챙겨야 할 일정들이 있다.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보는 가족 달력어플이 있다. 거기에 챙겨야 할 일정을 공유해 두고 상황이 되는 사람이 챙기고 있는데 지난달 달력을 보니 아무 이벤트도 없던 날이 고작 3일뿐이었다. 평일부터 주말까지 꽉 차있는 일정을 살뜰히 챙기며 고군분투하는 나의 육아동지 남편과 12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이들을 재우고 둘만의 대화를 나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서너 개의 행사 일정까지 겹쳐 아이들의 친구들까지 11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1박 2일 강행군을 마치고 밤늦게 아이들이 잠들고서야 결혼기념일이라고 마주 앉게 된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짜증내거나 피곤해함 없이 이 순간 둘이 마주 앉아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연애부터 결혼까지 18년 시간을 함께하며 울고 웃던 수많은 순간들이 만들어준 둘만의 깊은 연대감 덕분이 아닐까.
참여하고 있던 독서커뮤니티 방에 동영상 하나가 공유되었다. 결혼기념일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한 아내와 평일은 늘 회사일에 치여 밤늦게 돌아와 주말에 식사하자고 한 남편이 나눈 대화 동영상인데 저녁 한 끼 하자는 게 그리 큰 부탁이냐며 서운해하는 아내와 결혼기념일이 뭐 대수냐며 그래서 주말에 시간 보내자고 하지 않았냐며 화내는 남편의 대화를 두고 결혼기념일이 그렇게 중요한가에 대한 여러 사람의 생각을 집계해보고 싶다는 누군가의 글이 올라왔었다.
막 결혼기념일을 보낸 다음 날이라 서운해하는 아내의 입장도 그날을 챙기지 못함이 일 때문임에도 이해를 못 하는 아내에게 화가 나는 남편의 입장도 다 이해가 되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날 선 말들이 싸움을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날은 365일 어느 날이고 중요하지 않은 날이 없고 어느 순간이고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닐 텐데 우리에게 기념일은 정말 중요한 날일까 중요하지 않은 날일까.
레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사는 이유라고..
해년마다 반복되는 이런 날들이 반갑기보다는 소원해지기 쉽고 소중하기보다는 지겨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반복되는 날들에 감사와 애정을 담는다.
모두가 흘려보낸 어제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담기도 벅찬 감사의 하루 일수도,
누군가에게는 원망으로 눈물 짜내는 무거운 날 일지라도 그 시간이 흐르고 우리에게 또 새로운 날이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리고 그 숱한 날이 365일이나 된다는 것. 그리고 40년을 매일 아침 선물로 받아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매일같이 지나는 출근길 섬진강 둑길에 금계국이 가득 피었다.
늘 이맘때쯤이면 길가에 그득하게 피어나있고 어제도 분명 보았지만 오늘은 더 반갑고 예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알았지만 바라보지 않았을 땐 못 느끼던 소중함이다.
부디 아침저녁 쌀쌀한 찬기를 이겨내고 낮시간 뜨거운 폭염도 잘 견디어 내일도 나를 맞아주었으면,
그래서 내일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고 차창을 시원하게 열고 둑길을 달리며 흐드러진 모든 꽃들에 내 시선을 멈추고 애정을 전할 수 있었으면,
그리하여 내 진심 덕분에 그 꽃송이가 이번 봄을 그저 따뜻하기만 했으면,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의 매일도 일 년에 단 하나뿐인 생일처럼 기념일처럼 행복하고, 감사하고, 따뜻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