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힘드니 걸어가자!”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를 업고 가는 아빠가 안쓰러웠는지 산을 내려오시는 분들은 아이에게 한 마디씩 했다. 업혀 가기에는 여섯 살인 아이가 너무 컸고,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라 어린아이들도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업혀가는 아이는 못 알아듣는 척,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눈을 감더니 자는 척을 했다.
대부분의 아기들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면 넘어져 무릎을 다치거나, 탁자나 장식장 위의 물건을 잡아당겨 깨고, 부수고, 어지럽혀 여기저기 상처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아이는 한 번도 무릎을 다친 적이 없었다.
걸음마를 시작하고 나서 뛰어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다.
뛰지는 않더라도 걸어 다니면 좋겠는데 유모차에서 내려 열 걸음만 가도 많이 걷는 거였다. 조심, 조심 몇 발자국 내밀다가 항상 안아달라고 두 손을 내밀었다. ‘걷기 싫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내민 그림을 보고 나서야 왜 늘 안아 달라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아빠를 그렸는데 십 등신이다. 아주 길게 그린 다리는 몸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 20%는 몸통과 얼굴이다. 아이가 올려다본 어른들의 모습이 다들 이렇게 다리만 길고 괴상하게 생겼을 테니 길을 걷는 사람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한 번은 어린이대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태워 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고 탔는데도 한 바퀴를 돌자 울기 시작하고, 두 바퀴째에서 몸을 떨며 절규했다. 밖에서 사진을 찍어주던 아내는 놀라 회전목마를 중간에 멈추게 하고 우리 부녀만 내린 경험도 있었다.
겁이 많아 자전거도 못 타겠구나 생각했는데 보조바퀴를 달아주고 연습을 시키니 몇 달 만에 곧잘 타게 되었고, 뒤에서 잡아 주며 중심 잡는 법을 알려주니 혼자서 달리기 시작했다.
탈 것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스무 살이 된 아이는 운전면허시험을 보겠다고 시험 준비를 하더니 흥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코스는 감점 없이 다 돌았는데 마지막에 주차하면서 액셀을 너무 세게 밟아 뒤에 있는 경계석을 올라가 버렸어."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아까워” 하면서 아쉬워했다.
무려 세 번만에 코스시험에 합격하고, 마지막 시험인 도로주행시험을 보고 돌아온 아이는 “운전에 소질이 없나 봐, 주행 시험이 너무 어려워” 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아빠 면허 딸 땐 도로주행도 없었고, 코스시험만 있어서 지금 보다 쉬웠는데.. 면허 따기 힘들겠네.”하고 아이를 위로했다.
나 역시 여름방학에 운전면허시험을 봤었다. 필기시험은 문제지를 풀어보고 준비하면 되었지만 연습할 차가 없으니 코스시험이 문제였다. 먼저 면허를 딴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니 개인교습을 해주는 분들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한 시간에 얼마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만원이나 만 오천 정도 했던 것 같다. 강남면허시험장 앞에 가면 아저씨나 아줌마들이 다가와 “학생! 시험 준비해?” 하면서 말을 걸었는데 소위 말하는 야매 운전교습이었다. 나처럼 운전면허 학원에 다닐 형편이 안 되거나, 부모에게 받은 학원비를 술값으로 탕진한 친구들은 이런 개인 교습을 통해 운전면허 연습을 했다.
과외선생님의 차를 타고 도착한 넓은 공터에는 면허시험장과 똑같이 S, T 자 코스가 그려져 있었고, 다년간의 지도 경험을 통해 터득한 합격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다.
그것도 단 한 시간 만에....
“선을 밟으면 안 되니까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선을 봐야 돼. 그렇지!”
“거기서 멈춰, 어디서 멈추는지 선을 잘 봐”
“핸들을 이빠이 돌려, 다시 앞으로 가면서 핸들을 풀어, 잘하네!. 거기서 멈춰”
“ 다시 핸들을 이빠이 반대로 돌려.” “ 아니지. 선을 밟으면 안 돼. 다시 한번 해보고”
이빠이 덕분에 단 한 번에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T자 코스에서 방향 전환을 할 때 어느 선을 보고 핸들을 돌려야 한다는 선생님의 노하우는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코스시험에 합격하면 마지막으로 주행시험을 봤다. 지금처럼 시내 주행이 아니라 운전면허시험장에 학교 운동장의 트랙처럼 도로를 만들어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고,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면 다시 출발하고, 언덕에 정차했다가 뒤로 밀리지 않고 출발하는지 평가했다. 지금은 수동, 자동 면허로 구분해서 면허를 취득 하지만 그때는 자동기어 차량이 없었다. 모두 수동기어 차로 시험을 봤고, 가장 어려운 코스는 언덕에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는 거였다. 대부분 여기서 시동을 꺼뜨리거나 차가 뒤로 밀려 실격이 되곤 했지만 야매 선생님은 뒤로 미끄러지지 않는 방법도 전수해 주었다.
"이빠이 밟아!. 타이어 타는 냄새 나도 돼. 어차피 네 차 아니잖아? 언덕에서 밀리지만 않으면 합격이야! “.
하지만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앞사람들이 시험 보는 것을 구경하는데 모두들 시동을 건 후 깜빡이를 켜고 출발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출발할 때 방향지시등을 제대로 켜는지 감독관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기다리던 다른 수험자의 어깨를 살짝 치고 돌아보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요, 깜빡이 어떻게 켜는 거예요?”
연달아 도로주행시험에서 떨어지자 아이는 좌절하기 시작했다. 일단 시험 볼 때마다 지불하는 응시료가 너무 아깝고, 도로에 주 정차된 차가 너무 많아 번번이 차선을 변경해야 되는 타이밍을 놓쳐 실격된다고 했다.
주행시험 연습을 하던 한강변 공터에는 25층짜리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지만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시험 코스를 답사했다. 코스는 A, B, C, D 총 네 개로 되어있는데, 시험 당일 어떤 코스를 주행하게 될지 알려 준다고 한다. 시험장을 출발해 대략 5km 정도의 도로를 주행하고 다시 돌아오는 짧은 코스였지만 중간에 재래시장 앞을 지나고, 도로변에 기사식당과 고물상이 있어서 차로에 불법 주차된 차가 꽤 많았다. 면허증이 있는 운전자들도 차선을 변경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코스였다. 고작 열 시간 연수받고 살벌한 도로에 차 머리를 들이 미려면 무모하거나 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지만 겁 많은 아이에게는 무리였다.
그 옛날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포인트 레슨을 시작했다.
“일단 어디로 가야 할지 경로를 눈으로 익혀야 돼!” “옆에서 잘 봐. 저기 동원시장 사거리라는 이정표 보이지? 저기서 우회전해야 되니 오른쪽에 순댓국집 간판이 보이면 2차선으로 변경하고, 주차된 차를 지나면 다시 3차선으로 변경! 알았지?”
“ 저 앞에 공사하는 아파트 보이지?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하면 이쯤에서 미리 차선 변경해서 좌회전 준비하고”
3시간에 걸쳐 네 개 코스를 돌아보고,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경적을 울리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2차선으로 계속 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네 번이나 떨어져 이번에는 붙을 때가 돼서 합격한 건지, 아빠의 개인 레슨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는 다음날 톡으로 “면허 땄어!”라며 감격의 이모티콘을 날렸다.
약간 뻥을 치자면 나 역시 대학 합격보다 운전면허증을 땄을 때 훨씬 기뻤다. 집에 자가용은커녕 몰고 나갈 경운기 조차 없었지만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좋았으니 아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